망해도 된다고 하니 자유로워졌다

인생은 관람용이 아니야

by 이영선

무언가를 깨끗이 닦을수록 자꾸만 달라붙는 아주 작은 먼지 한 톨이 거슬린다. 그래서 닦고 닦고 또 닦는다. 청소를 깨끗이 하면 할수록 더러운 것이 자꾸 보이고 해야 할 것들이 더 늘어나게 된다. 그것은 큰 오물을 치울 때보다 더 신경이 쓰이는 일이다.


작품의 막바지에 다다르면 자꾸자꾸 세밀한 것들에 더 신경이 쓰이게 되고 그것들이 바로잡아지지 않은 것에만 집중을 하게 되어 애초에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에 대한 것조차 잊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이때가 창의성이 가장 최소화되는 단계이다. 작품을 하다가 답답할 때면 어김없이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잠시 의식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시간을 갖는다.


내 작품의 창작과정에 대한 지루하고 반복되는 이야기를 전혀 힘겹게 듣지 않는 친구는 내가 제시한 몇 개의 의상 아이디어에 대해 역시나 그만의 위트 있는 방식으로 나의 머리 아픈 고민을 해결해주었다.


"그건 나중에 생애 마지막 공연 때 입어."

"왜?"

"망해도 되는 공연에 원하는 아무거나 입으란 의미지. 어차피 마지막일 거잖아? 그때 가서 안 말릴 테니 입고 싶은 거 다 입어. 그런데 지금은 아닌 것 같아."


나는 작품에 입을 의상에 대해 며칠 째 머리 아픈 고민을 하다가 친구의 말을 듣고 갑자기 어디서 웅장한 음악이 들리면서 빛이 환하게 들어오는 깨달음의 순간을 경험했다. 그것은 마치 해탈의 순간과 같았다. 갑자기 온갖 아이디어가 떠오르면서 갇힌 방의 자물쇠가 풀어지며 막혀있던 창작의 통로가 뻥 뚫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망한 공연'의 콘셉트에 급히 흥미로워졌다. 망해도 되는 공연이라고 생각하니 그간 생각은 했지만 사용하지 않은 온갖 아이디어들이 떠올랐다. 망해도 된다고 하니까 그 모든 아이디어들을 그냥 아무렇게나 넣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그런데, 생각만으로도 오히려 내가 그간 심사숙고해서 거르고 닦은 작품보다 훨씬 더 재미있게 다가왔다. 사실 창작과정을 거치는 동안 아이디어들 간의 연결고리를 약간은 억지스러울 정도로 논리적으로 매끄럽게 하면서, 처음에 자유로웠던 아이디어들을 옭아매는 것과 같은 작업을 하고 있던 것이다. 나는 갑자기 신이 나서 할 일이 많아졌다. 풀리지 않는 하나의 아이디어에 목숨을 거는 것보다 망해도 되는 공연에 온갖 것들을 다 집어넣을 생각을 하니 신이 났다. 앞에 있는 몇 개의 사과를 먹겠다고 갔는데 뒤를 돌아보니 수많은 과일과 음식들이 널려있는 이미지가 그려졌다.


큰 빌딩의 번쩍거리는 로비처럼 너무나 깨끗이 청소를 한 공간에서는 긴장감을 늦출 수 없는 것처럼, 너무 정제된 아이디어들은 사고를 경직시키는 경향이 있다.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잘 살려고 하면 오히려 안되고 결과에 상관없이 이리도 넘어져보고 저리도 넘어져보며 살면 인생이 더 재미있는 것 같다. 넘어졌을 때 더 많은 것들이 보이고 더 많은 옵션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어차피 우리는 다 망하는 곳으로 가게 될 테니 그다지 손해 볼 일도 아닌 듯하다. 죽으려고 하면 산다는 말이 살갑게 느껴졌다. 살려고 겨우 붙잡고 가는 갈대 같은 여린 줄기 몇 개를 버리니 수많은 풀과, 물줄기와, 나무와 새와 하늘이 보이는 그런 느낌 말이다. 앞에 있는 줄기 하나만 잡고 한 방향으로만 가는 게 인생이 아니라고 왜 말해주지 않는 걸까? '망한 공연'이라는 생각이 막힌 아이디어의 자물쇠를 푸는 열쇠이듯이 '망한 인생'이라는 암호명이 어쩌면 여태 옭아맨 인생을 자유롭게 하고 더욱 생동감 있는 인생을 살 수 있게 할지도 모른다. '못해도 돼, 망해도 돼'라는 말을 하고 나니 앞에 있던 두터운 벽이 얇은 종이 벽으로 변한 느낌이었다. 정제된 인생은 흐트러질까 봐 긴장하고 그저 바라만 봐야 하는 인생일지도 모른다. 인생을 좀 더 흐트러뜨리고, '망해도 돼, 못해도 돼'라는 주문을 자주 떠올려 관람용 인생이 아니라 움직이며 살아가는 생명이고 싶다.


'아, 망해도 되는구나!'


이번엔 망해도 되는 무언가를 시도하는 것이 새로운 프로젝트의 시작일지도 모르겠다. 너무 애쓰지 않고 잘하려고도 하지 말아야겠다. 그저 잘 놀고 행복해야겠다 다짐한다. 넘어져 봤자 땅 위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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