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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선 Jan 18. 2023

글을 쓰는 형식에 대하여

나의 내면세계를 가장 잘 전달하기 위한 작법에 대해 생각하다

'의식의 흐름 기법'에 대해 익히 들어봤을 것이다. 미국 남부문학을 대표하는 윌리엄 포크너가 이 작법을 사용해서 글을 쓴 것으로 유명해져 있지만, 실제로 처음 이런 작법으로 글을 쓴 것은 도로시 리차드슨이라는 작가였다. 그녀는 기존의 기승전결에 익숙한 논리적인 스토리식 전개를 남성적 작법이라고 생각했다. 남성 작가들이 쓴 기존의 문학에 등장하는 여자들의 대화 방식과 심리묘사는 실제 여성의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런 이유로 여성의 내면을 묘사하기 위해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글을 쓰게 되었던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생각하는 방식이 실제로 그렇게 구분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나도 언젠가부터 내 생각을 담아내기 위해서 기존의 작법이 뭔가 적절치 않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나의 내면세계와 생각을 기존의 형식으로 쓰게 되면 실제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느낌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를 표현하기가 어렵다고 느끼게 되었다.


나도 논리적인 글을 꽤 잘 쓰는 편이라고 생각하지만, 글을 한참 쓰다 보니 내가 본질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담을 수 있는 다른 방식의 작법을 찾게 되었다. 그건 단지 새로움을 위한 새로움, 혹은 실험을 위한 실험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미국 대학원에 다닐 때, 실제로 교수들은 학생들에게 새로운 형식의 결과물을 기대하며 그런 과정들을 부추기는 편이었다. 창작을 다루는 학문의 특성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꼭 그렇다기보다는 어느 분야에나 기존의 것을 고수하면서도 무언가 새로운 것이 나타나 기존의 관념을 흔들기를 기대하는 분위기도 있던 것 같다. 나의 진지함과 의욕은 물론 그들의 기대를 훨씬 넘어서서, 졸업식이 끝나고 나서도 한동안 교수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되기도 했다. 상당히 이례적인 형식이라 호불호가 갈렸던 것 같다. 나도 물론 한 번 맞다고 생각하면 내 고집도 보통 센 게 아니어서 끝까지 버텼다. 마지막까지 안된다고 하면 나는 하나님이 직접 싸우라고 할 요량으로 마지막 미팅에 성경책을 가방에 넣어가지고 갔다. 다행히 학과장은 나를 꼭 안아주며 미팅을 끝내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논문 이전의 방식으로 글을 쉽게 쓸 수 없었다. 그건 이미 깨고 나온 알 속으로 다시 들어가려는 것과 같았다. 글의 형식이 실제와 다른 것을 묘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왜 갑자기 글을 쓰는 게 어려워지고, 기존의 방식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을까 오랫동안 고민했다. 그 고민은 내 다른 작품의 창작방식과도 맞물려 있었다. 요즘에 그 고민에 대해 나름의 해결을 찾아가고 있는 듯하다. 해결이라기보다는 누가 뭐라고 하든 나의 필요와 개성을 스스로 인정하고 이에 편해지기로 결심한 것이다. 나의 세계와 주파수가 맞는 또 다른 누군가를 찾으면 그만이다.


여러 가지가 이유가 있겠지만 우선 내가 관찰하고 체험하는 세상은 기승전결, 혹은 클라이맥스가 있는 스토리구조로 진행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게 논리적이고 편하다고 사람들은 생각하지만, 나는 그게 영 불편하고 사실이 아닌 것을 믿으라고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오래전 나와 잘 통했던 미국인 친구 한 명이 말한 적이 있다. 예를 들면, "논문은 사실 비현실적인 글이다. 어느 일부분만 확대해서 다른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쓰는 글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에 동의했다. 논리적이라고 믿고 있는 것들이 사실은 논리적이지 않기도 하다.


다른 이유는 내가 보는 세상은 지구상의 모든 생물의 수만큼의 시간과 공간이 교차하는 아주 다차원적인 곳인데, 마치 하나의 시간과 공간에서 모두가 살고 있다는 가정하에서 글이 쓰인다는 것이다. 하나의 스토리 구조 안에서 삭제되고 조명되지 않는 많은 사건과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우리는 그것이 없다고 약속하고 그 스토리를 선형적이고 일률적인 방식으로만 보는 것이다. 나는 그래서 그 선형구조 안으로 다면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총체적인 것들을 넣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쩌면 한동안 글을 쓰기 힘들었던 것 같다. 공간의 개념인 세상의 이야기를 선형적으로 집어넣기가 힘든데, 굳이 하려면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고 나면 실제 경험한 다면적인 것들이 일차원이나 이차원적으로 납작해져서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말하는 방식도 글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나는 점점 더 두서없이 말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렇다고 미친 사람처럼 두서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서는 분명히 내가 말해야 할 조그만 조각들이 있어서 나름의 질서가 있는데, 그 질서가 말을 장황하고 묘사적으로 느끼게 만드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그리고 나는 하나의 생각이 또 하나의 생각으로 가지를 치는 것을 내버려 두는 편이다. 그 가지가 생겨나는 게 정황상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게 내가 어떤 사건을 접한 경험에 대해 더 현장감 있게 전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나는 상대방이 겉으로 계산해서 내뱉는 논리 정연한 말 그 자체보다는, 이를 비논리적인 것과 함께 전달할 때 사건의 본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말이라는 정제된 기호보다는 상대의 마음과 영혼을 읽게 되는 것이다. 마음과 영혼이 보이면 들리는 언어는 곧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된다.


세상은 도서관 책장에 꽂힌 책처럼 가지런한 질서를 따르지 않는다. 삶의 기승전결과 클라이맥스 따위는 믿지 않는다. 혼란이 산재한 글 속에서 진실이 보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런 글을 더욱 적나라하게 써보아야겠다고 생각한다. 나 자신에게 솔직하게, 나의 내면의 색채를 그대로 보여주는 그런 글을 말이다. 사실 모든 훌륭한 작가들은 그렇게 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과 가장 근접한 글을 썼을 것이다. 두려움 없이 나를 꼭 닮은 글을 계속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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