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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선 Oct 30. 2023

좀비아줌마

이웃에 '좀비아줌마'가 산다. 아마 60대에 접어들었을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엄청 멋있게 생겼다. 2년 전 전시장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우와'라는 생각이 마음속에서 들었기 때문이다. 예쁜 것도, 날씬한 것도, 고급 옷을 입은 것도 아닌데, 스타일이 나이와 보이는 것을 넘어 멋스러운 느낌을 준다. 나도 나이가 들면 저런 멋이 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 아줌마는 시골 동네 작업실 문에 조그맣게 붙여놓은 전시포스터를 보고 서울 전시장까지 직접 찾아와서 처음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쓴 글에서처럼 작품을 팔려고 하다가 여타 이유로 팔지 않은 적이 있고, 이후로 한 번도 연락을 한 적이 없다. 나는 이 아줌마를 '위험한 사람'이라는 나만의 딱지를 붙이고, 한마디로 차단을 해버렸다. 그런데 이번 오픈 스튜디오 전시 때, 첫 포스터를 붙이고 있는 사이에, 갑자기 다시 웃는 얼굴로 언제 그랬냐는 듯 나타났다.


내가 가장 커다란 맹점이 있다면 눈앞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무방비 상태로 좋아한다는 것에 있다. 다시 나타난 그녀에게 나는 아무 일도 없었는 듯 전시에 대해 묻는 말에 대답을 했고, 그녀는 전시 때 오겠노라며 내게 먹다 남은 군밤과 꽈배기 도넛을 몇 개 나눠주고 갔다. 나는 군밤과 도넛을 좋아하니까 다시 그녀를 '위험한 사람'에서 '좋은 사람'으로 딱지를 바꾸고 차단을 해제해 버렸다.


전시 때 나타난 그녀는 작품에 대해 드로잉 터치가 어쩌고 하며 내가 좋아할 만한 자잘한 칭찬을 늘어놓는다. 처음엔 좋았다. 그런데 좀비아줌마가 집으로 돌아간 뒤에는 뭔가 찝찝한 기분이 들어서 심장이 불안해진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마음에 도둑이 들었다가 간 기분이다. 뭘 훔쳐가지 않았는지 공간을 살피는 사람처럼 마음의 공간을 살핀다. 불안하다. 내 마음에 경고등이 켜진다. 아무것도 없는데 뭔가 없어진 느낌이다. 아무 일 없이 울고 싶어지는 느낌이 든다. 그냥 그녀가 다시 내 삶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좀비 아줌마는 내 작품 하나를 덜렁덜렁 대충 손으로 집어갔다. 나중에 가격을 알려주면 돈을 송금해 주겠다고 했다. 저녁에 남편이랑 또 왔다. 프린트 작품을 더 많이 살 테니 가격을 깎아 달라고 했다. 나는 애초에 가격 따위를 정하지도 않았지만, 내 작품을 좋아해 주는 게 좋아서 아무 생각 없이 인쇄비 정도만 받고 가져가라고 했다. 속으로는 그냥 다 주고 싶었는데, 그간 친구와 나름의 심리 트레이닝을 한 후에 그냥 주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았기에 최소한의 가격을 불렀다. 그다음에 온 친구와 방문객이 아무리 몰라도 4배 이상의 가격을 받았어야 했다고 안타까워했다. 나는 마음이 불안한 이유를 알았다. 조금만 나에게 마음을 주면 가진 장난감을 다 줘버리는 아이처럼, 그냥 다 줘버리고  마는 멍청한 습성이 또 나온 것이었다. 머리를 쥐어뜯는다. 타고난 성향은 왜 이리 고쳐지지 않는 건지 도무지 바뀌지가 않는다. 이제 생각해 보니, 그 작품들은 몇 날 며칠을 고민하고 칠하고 컴퓨터 앞에서 작업을 하고 인쇄소를 고르고, 다시 편집을 하는 과정을 거쳐 힘들게 만든 내 시간과 영혼의 결과물인데, 나는 늘 타인의 웃음에 약하다. 내 작품들이 멍청하다고 나를 째려보는 것 같다. 작품들에게 미안하다.


내 작품을 다시 뺏어오고 싶다. 나머지 다른 것들도 가지러 온다고 했는데, 우선 적군을 피해 도망가는 사람처럼 작품을 죄다 꽁꽁 묶어 집에 가져다 놓았다. 멍청한 갈등이 생긴다. '아직 돈을 지불한 것도 아닌데, 안 판다고 하면 화를 내겠지? 내가 애초에 잘못 판단한 건데. 이미 가져간 건 어떻게 달라고 하지? 그냥 줄까? 아니, 그 사람이 내 작품을 가지고 있는 것도 싫은데, 차라리 가진 걸 폐기해 달라고 하고 싶은데, 찾아가서 가지고 올까? 어떻게 하지? 내가 이럴 줄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몰라.' 내 작품이 그리 대단하거나 비싼 가격이 매겨지는 그런 건 아니지만, 나는 그냥 그녀가 내 작품을 갖고 있는 게 너무 싫다는 감정이 강해진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세련되고 쿨한 듯한 그녀와 대화를 하는 순간, 나는 마법에 홀린 것처럼 말려들어간다. 집에 와서 그녀가 썼던 대화의 문구를 되새겨보았다. 거슬리는 표현과 행동들이 있다. "내가 잘해주니까 동네 사람들이 내가 나쁜 의도가 있는 줄 오해하기도 한다", "00 씨를 도와주려고 한다", "작품을 저렴하게라도 다 팔아야 한다", "팔고 또 그리면 된다" 등의 표현과, 작품을 손으로 대충 쓱 덜렁덜렁 집어가서는 오려서 벽에다가 꼭꼬핀으로 붙였다고 하는 그런 것들이 영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마법이 4일째쯤 가서 풀리자 현실감각이 돌아오면서, '또 말려들어갔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내 머리통을 쥐어박고 있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태도, 나는 도와달라고 한 적도, 도움이 필요한 존재도 아닌데 '도와준다'라는 어구로 상대를 자신보다 나약하거나 아래에 있는 존재로 가스라이팅하며 무시하고 있는 태도, 헐값에 자꾸 내 작품을 가져가려고 하는 태도, 작품을 함부로 오리고 집에 붙이는 등의 태도 등이 뒤섞여서 심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는 '도와준다'라는 사람과는 일도 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일을 늘 그르친다. 또한 작품을 가격을 매긴 상품 취급을 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냉철한 것 같으면서 나의 맹점은 상대방의 작은 친절과 미소에 무너져 내리는 것에 있다. 내가 생각해도 나의 행동에 어이가 없다. 그런데 뭔가에 홀린 듯 그녀와 있으면 나도 모르게 꼭 그렇게 된다. 그녀가 간 다음에는 꼭 뭔가 영혼과 시간이 도둑맞은 느낌이다. 애초에 아닌 사람은 다음에도 아닌데, 나는 또 왜 그녀에게 문을 열어주었을까? 2년 전 같은 사람과 비슷한 일이 또 일어나고 말았다. 차이가 있다면 이번엔 먼저 가져간 작품 하나가 볼모로 잡혀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볼모로 간 작품을 구해내야 하나, 포기해야 하나. 또다시 씁쓸한 교훈을 얻는 날이다.


아, 가져간 작품을 찢어달라고 하고 싶은데, 그것도 안되면 그냥 잊고 나머지 작품들에 대해서는 그냥 모르는 척을 하고 있을까? 작업실 문을 꽁꽁 잠그고, 문을 두드려도 열어주지 말까? 손해 보는 건 나인데, 왜 내가 미안하고 실수한 느낌이 드는 건지, 참으로 유치하면서도, 난감한 문제를 풀어야 하는 날이다. 우선은 '좀비아줌마'라는 라벨을 절대로 떼지 말아야겠다고 내게 경고를 한다. 그녀가 제발 작품을 가지러 오기로 한 부분을 기억에서 지우고 다시는 안 나타나기를 바란다. 내 전시에 와서 아무도 가격 얘기나 '팔아야지' 따위의 얘기를 안 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뭔가 팔고 싶으면 본인 자식들이나 다 내다 팔아버리든지 꼭꼬핀으로 오려서 벽에 붙이던지 화장실 문 앞에 붙이던지 하라고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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