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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선 Jul 22. 2024

투명한 물

상대가 물었다.

'낮의 물이요, 밤의 물이요?'

나는 '밤의 물'을 선택했다. 

깊은 청색으로 덮인 그의 조그만 테이블을 바라보며,

여름날 차가워진,

한밤 중에 풀숲 사이를 검게 흐르는, 

그리 깊지는 않은 물이 찰랑거리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 차갑고 청량한 물속으로 발을 살짝 담그고 싶었다. 

그런데 왠지 작은 벌레들이 물속에 우글거리며 

이끼 낀 돌들 위를 떠다니고 있을 것 같아서

몸이 편히 놓이지 않았다. 

내 몸을 그 공간에서 도려내어 벌레가 없는 곳으로 옮겨가고 싶었다. 

벌레가 없다면 물은 시원할 것 같았고,

깊어야 무릎 아래로 약간 올라올 것만 같았다. 

망할 벌레들!


폭우와 무더위가 내리치는 한여름의 작업실은

거미와, 벌레와, 민달팽이, 커다란 지렁이들의 공격을 막아낼 도리가 없다. 

화단에 잔뜩 심은 나무와 꽃 덕분인지

유난히 많은 콩벌레들이 문틈 아래를 정복하고 있다. 

나는 극도로 예민하고 몸에 긴장이 들어가며

울컥거리기 직전까지 신경이 곤두서 있다. 


벌레가 모든 구석을 점령하고 있을 것 같아, 모든 물건들의 주변을 들춰보고, 

작업실이 마치 벌레들로 까맣게 덮여있는 듯한 상상이

실제처럼 의식으로 다가온다. 


내가 치워버린 모든 벌레들이 

마치 그 작은 테이블보 속의

상상의 물속에 파묻혀 우글거리고 있을 것 같다. 


세상의 벌레들이 모두 나를 따라 내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것 같다. 

그 음악가는 내 얘기를 모두 듣는다. 

나는 그 벌레가 

내 작업실 앞 주차장에 번호도 남기지 않고 차를 주차하는 무례한 인간들이기도 하고, 

불쑥 문을 열고 들어오는 각종 종교인들, 

할 일없이 동네를 돌아다니며 내 시간을 훔쳐가는 늙은 동네 아줌마들

예술에 대해 무지한 이 도시의 익명의 주변인들로 확장되는 것을 경험한다. 

나는 나의 공간과 시간을 침해하는 벌레가 아닌 

질적인 소통을 원했던 건데, 

결국 나는 도로로 난 작업실의 모든 문을 걸어 잠그고

블라인드를 내리고, 창문은 벽돌모양의 폼블록을 높이 쌓아

동화 속 키다리 아저씨처럼 되어버렸다. 


그 음악가는 기타를 꺼내어 내게 노래를 들려주었다. 

딸에게 들려주곤 하는 자신의 자작곡이라고 했다. 

음악가는 자신의 내면에서도 하고팠던 말을 내가 빠짐없이 대변한 듯하다고 말했다. 

벌레들의 존재를 그도 안다고 하니, 

벌레들이 그 검은 물에서 점점 사라졌다. 

사실 그 물속에는 이끼가 있는 돌이 아닌 

뽀얗고 깨끗한 모래가 있었고

내 발을 청량하고 시원하게 감싸는 물이

투명하게 흐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와의 소통이 

내 의식이 까맣고 작은 점과 같은 벌레들을 투명하게 만들어버렸다 

나는 그가 부르는 노래를 들으며

내가 보았던 모든 벌레들을 종이 위에 그려내었다. 

끔찍한 벌레들!

아, 여름이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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