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아트센터 지하 1층 특별관
내 인생이 나름 찬란했다 느낀다. 몰랐는데, 정말 여러 가지를 경험하여 다채로운 삶을 잘 꾸려온 걸 몰랐다. 뒤 돌아보니 내가 살아온 길이 이렇게 무지개색 오색 찬란한 길이었는지 몰랐다. 나 스스로 '내가?'라며 대단해 보인다. 내가 이걸 다 어찌 해내고 있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늘 부족해 보였는데 별 걸 다 해봤다. 그렇다고 끝이냐 하면 난 아직 하고픈게 많다. 물론 이루지 못해도 상관없다. 나는 현재를 이루고 있는 사람이고, '언젠가 이룰' 무언가를 하릴없이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남은 날이 있다면 그 한 방울의 인생길 끝까지 멋지게 꾸미고픈 것이 줄줄이 있다는 말이다. 남은 기간 최대한 시간과 기회를 쪼개서 내 존재대로 가능한 많이 펼치고 느끼고 경험하며 살아가려고 한다.
인생이 정말 짧다는 걸 느낀다. 통장에 아껴둔 돈을 잘 쪼개서 쓰려는 마음처럼, 내 인생의 통장에 저장된 여유시간이 얼마 없다고 느낀다. 그간 학교에서 직장에서 혹은 남의 일정에 맞춰진 인생을 쓰느라 쓴 시간들이 얼마나 아까운지 모른다. 물론 나는 20세 이후로는 나름 내 시간에 맞추어 살긴 했다. 가장 아까웠던 시간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때까지의 정규 교육에 쏟은 황금 같은 시간들이다. 그때의 시간의 질은 이후의 시간의 질량과는 차이가 있다. 내가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면 가장 안 해야 할 일 중 하나는 정규교육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세상의 구석구석을 여행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배울 것 같다. 세상에 저렴하고 자유롭게 펼쳐진 크고 작은 학교에서 배울 것이다. 상추 선생님, 나무 선생님, 공원 선생님, 동네 도서관 선생님, 운전기사 선생님, 나비 선생님, 등등...
대학 전에 다닌 학교에 다닌 시간들을 가장 후회한다. 잘못된 세계관과 인생관을 거기에서 장착해서 그거 벗어나느라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제도는 가급적 최소한으로 가까이하는 게 심신 건강에 이롭다. 삶에 제도는 최소한이어야 한다. 학교가 다 망해버렸으면 좋겠다. 아니 이미 망해버린 걸 사람들이 관성의 법칙 때문에 계속 다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이 자연처럼, 새처럼, 호랑이처럼, 나비처럼 생긴 대로 자유롭고 편안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세상에 문명이 생기고 나서부터 디스토피아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학교나 직장에서 자기 그릇에도 맞지 않는 걸 하느라 쓸데없이 돈을 쏟아붓고 목적 없이 매여 있는 사람들의 목덜미를 끌어내어 정신 차리고 이 짧은 시간을 정말 원하는 너를 위한 시간을 살라고 외치고 싶고, 또 그렇게 하고 있지만, 기성세대가 된 내 동년배 사람들도 아이가 생긴 내 동생들도 결국은 비슷한 시행착오의 경로를 걸으며 힘겨워하고 있다. 인생은, 세상은 그런 게 아니라고, 원래 내비게이터 따위나, 신이 만들어 놓은 도로 같은 건 없다고, 그 진리를 알려주려고 그렇게 떠들어대고 몸소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데, 누가 뭐라고 시킨 사람도 없는데 왜 끝이 비슷한 행로를 걸으며 그렇게 살면서 자꾸 불행하다고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높은 산 위에 결국 뻥 뚫린 광활한 하늘 밖에 없다는 것을 아직 겪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내 말이 허공의 메아리 같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놈의 자살률 1위... 출산율 최하위... 1등만 중요하다고 떠드는 문화, 서울 외곽의 미분양 닭장 아파트 공화국... 자신의 아이디어를 지닌 창업자가 아닌 고작 대기업 월급쟁이를 더 높이 평가하는 기이한 사회현상... 사랑이 뭔지도 몰라서 한 결혼에 급격히 증가하는 이혼율... 당신이 중요하다, 사회고 국가고 간에 당신 개인이 우선 중요하단 말이다!
그건 그렇고 나는 9월에 있을 미국 아트프라이즈 전시 이전에 이번 주 수요일부터 일요일까지는 인사동 마루아트센터 지하 특별관에서 단체 기획전에 작품 24-26점을 전시한다. 개인전의 형식과 내 나름의 기획을 더 선호하지만, 우연한 기회에 다른 작가들과 부대끼는 자리에 작품들을 일부 보여주게 되었다. 사실 내 스튜디오가 여느 갤러리 전시장 보다 훨씬 더 예쁘고 고귀하다. 사람들이 잘 모른다는 것만 제외하고는 말이다. 어쩌다 이렇게 그림 전시까지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우연'이 인생의 묘미이고, 나는 그걸 '희망'이라 부른다. 인생이 계획대로만 되면 그 얼마나 재미없고 불행한 일인가? 무슨 그 따위의 인생이 있단 말인가?
내 그림들은 나를 닮았다. 이번 전시에는 <31 Hares>라는 작품 시리즈의 일부를 전시하는데, 나는 내가 그렸지만, 내 그림 보면 귀엽고 기분 좋다. 볼 때마다 피식 웃음이 난다. 아무 생각 없이 그렸어도 그 안에 내 생각이 모두 담겼다. 내 생각엔 그런 게 좋은 작품이다. 계획을 하는 작품은 그 출발선부터 정신과 작품이 이미 분리된 상태라서 좋은 작품으로서는 글렀다고 생각한다. 그냥 그려야 한다. 철저히 현재시점으로 작품의 아이디어와 삶이 완전히 싱크로율 100퍼센트로 뭘 그릴지, 뭘 그리고 있는지 계획도 생각도 할 틈이 없는 그 순간에 가장 좋은 작품이 나온다. 삶이 차오를 때 그냥 툭 작품으로 터져 나오는 게 가장 좋은 것 같다. 내가 누군지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아야 비로소 나인 것처럼 말이다. 글도 그렇다. 심장에서 따끈따끈할 때 꺼내어 옮기는 글이 가장 내 맘에 든다. 사랑할 때 누구를 어떻게 사랑해야지 하는 거 말고, 사랑했는지도 몰랐는데 사랑하고 있었던 게 진짜였던 것처럼 말이다. (내가 그랬다. 그런데 그게 진짜 사랑한 거였고, 진짜 행복한 거였다. 사랑한다고 주문을 외고 있다면, 그건 도무지 사랑하고 있지 않아서 그럴 가능성이 많다.)
글에 존재하는 나는 수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전시장에 존재할 것이다. 나는 내가 작품이다. 내가 그토록 바라고 원하던 대로 나는 작품이 되었다. 내가 뭘 하든 그건 다 작품이고, 나는 내가 무엇을 그리고 표현했는지보다 '나'가 중요하다. 오랫동안 헤매던 나를 찾아서 조금 더 있으면 그조차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나의 진정한 '자존감'이 뭔지 찾게 되는 그 시점에 다다른 것 같은 느낌이다. 나를 찾아 떠난 나의 오랜 여정이 막바지에 다다른 느낌이다. 너무 늦었지만, 늦은 사춘기의 방황을 이제서야 끝내고 그다음의 삶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들을 계속 도전할 것이다.
(같은 장소에서 열리는 두 개의 기획전에 모두 참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