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Have Fibromyalgia (Chronic Fatigue Syndrome) but it Doesn't Have Me! A Memoir"
by Chantal K. Hoey-Sanders
친구의 책을 다 읽었다. 자신의 내면의 생각을 생생하게 기록한 글이라 금방 몰입이 되었고, 그다지 어려운 문장으로 쓰인 영어가 아닌 데다가, 문학적인 표현방식이 적절히 섞여 있었으며 필요한 부분들이 적절히 잘 구성되어 나름 흥미로웠다. 친구는 오래전 한국에도 와 본 적이 있고,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며 미국에서도 스페인 교사로 근무하다가 쓰러져서 이후 직업을 잃게 되었다고 쓰여 있다. 언어를 다양하게 구사하니 당연히 글 쓰는 솜씨도 일반인보다는 좋을 것이다. 2011년에 출판된 책이라 이후의 다른 삶의 부분은 아직 들은 바가 많이 없지만, 2002년에 처음 발현한 증상부터 책을 출판할 때까지의 기록을 담고 있다.
이 친구의 증상은 매우 복잡하고 힘든 것이지만, 인생을 살다 보면 증상은 달라도 고난과 고립에서 오는 감정은 비슷한 것이기에 글의 내면에 담긴 감정에 이입이 되어 내 마음에도 불끈 어떤 다짐이 생겼다가 책의 마지막에 어떤 출구로 이 글이 마무리가 되었는지 알고 싶어서 멈출 수가 없었다. 그녀의 고통에 이입이 되어 나도 아픈 듯한 증상이 잠시 느껴졌지만, 그래서 더욱 희망적인 뒷부분까지 빨리 읽고 싶었다.
나도 몇 년 전 코로나의 충격으로 인해 팔이 펴지지 않는 증상이 갑자기 출현함으로써 심리적 충격과 함께 병원의 진단과 치유의 과정에 대해 예민하게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나는 한 권의 분량만큼 그때의 기록을 할 생각은 못했지만, 일곱 편의 글을 쓰면서 내 감정과 신체, 존재에 대해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또한 몰랐던 사회의 일부분과 한 번도 만날 일이 없었던 부류의 사람들과 소통을 할 경험을 갖게 되었다.
병이라는 게 무엇일까? 단순히 통증을 뜻하는 말은 아니란 걸 알게 된다. 통증과 결부된 삶의 모든 부분이 의식의 표면을 두드린다. 나도 병원에 다니는 생소한 경험을 겪을 때, 매우 다양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글로 기록하긴 했는데, 이걸 누가 읽을까 해서 오래전 기록한 일부 글은 내리기도 했고, 최근에는 치아교정에 관한 이야기를 쓰면서도, 같은 이유로 중간에 한 번 기록을 멈추기도 했다. 이런저런 생각에 휘둘리며 그때그때 경험하는 생생한 생각들을 제대로 펼쳐내지 못한 것에 대해 좀 아쉬운 부분이 있다. 친구의 책을 독자로서 접해보니, 병증을 이겨낸 체험수기가 단순히 그 병을 가진 사람의 통증에 대한 것 이상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친구의 경우 글이라는 기록을 하는 과정이 오히려 그녀를 치유했던 게 아닌가 싶다.
친구의 글은 단순히 통증과 의료적 처방에 대한 것이 아니다. 물론 의료적 처치에 대한 나름 자세한 묘사가 되어있다. 책은 통증으로 무너진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재정립하고 일어서는 모든 과정에 대한 것이다. 통증을 단순히 ‘어디가 아프다’라는 것으로만 받아들인다면, 치유는 잘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환자도 의료진도 보이는 것 이외의 소통과 관심이 필요한데 그게 현 의료 상황에서는 불가한 것을 잘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어디가 부러지고 찢어지는, 당장 처치의 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 병증이 아니라면, 글을 써보거나 그럴 수 없을 때에도 친구처럼 녹음기로 자신의 상태를 기록하는 것이 스스로 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병은 겉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환자 내면을 주변의 사람들이 더 이해할 수 있는 통로가 되기도 하고, 의료진에게도 논문과 같이 공식 기록에 나와있지 않은 양상과 치유방식을 더 다양하게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사람의 몸과 삶은 그 수만큼 다 다르기 때문이다. 병원을 많이 다녀본 건 아니지만, 최근 몇 년간 정형외과와 치과를 다녀본 결과 환자와 의료진의 접근법은 사람들의 수만큼 다양하고, 교과서적인 결과를 기대하기가 힘든 모호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광고에 떠드는 듯한 완벽한 치료는 없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고, 때로는 온전한 치유는 알 수 없는 경로로 자연스럽게 일어나기도 한다.
책의 모든 부분이 흥미롭지만 간략히 얘기하자면, 친구는 어느 날 통증으로 수업 시간에 쓰러진 후 직업을 잃고, 대부분의 것들로부터 고립되었다. 그녀는 온갖 병원에 다니며 각종 검사와 약물 처방을 받지만, 다양한 오진과 함께 증상이 지속되는 것을 경험한다. 병원에서조차 진단명을 내리지 못하는 상태에서 사회보장제도나 휴직을 하는 것에 대해서도 서류상 문제가 생기며 열정적으로 살아온 자신의 삶이 부정당하는 실패자로서의 느낌을 갖게 된다. 겉으로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심한 통증을 겪고 있는 환자가 아닌 것으로 오인되기도 한다.
그러다가 지역에서 침술을 시행하는 의사(MD acupuncturist)를 만나면서 그로부터 UCLA 내분비학 임상교수이자 전문의였던 Paul St. Amand의 책 “What Your Doctor May Not Tell You about Fibromyalgia”을 한 권 건네받는다. 참조로 이 교수는 주류 의학계에서 자신이 소개하는 프로토콜이 인정을 받지는 못했지만 환자 커뮤니티에서는 그의 책과 함께 많은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의학적 검증이 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없으나, 그의 책을 읽어보지 않아도 왜 그가 인기를 끌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친구의 책을 읽어보니, 친구를 치유한 것은 ‘신뢰’ ‘믿음’ ‘소통’ ‘동기유발’ ‘의지’와 같은, 병원에서 처방할 수 없는 것들이라고 느껴졌다. 아마도 Amand 박사의 책이 그런 심리적 동기유발을 주는 글이었을 것이다. (조만간 한 권을 주문해서 볼 생각이다. 의학책으로서가 아니라 그 외의 부분이 궁금해서이다.)
원래 박사가 주창한 프로토콜은 효과가 있다고 검증되지 않은 구아이페네신 (Guaifenesin)을 복용하면서 엄격한 식이요법 등을 함께 시행하는 것이다. 환자들 사이에서 효과가 있다는 사람과 없다는 사람들에 대한 논란이 있다. 당연히 대체의학에 대해 경기를 일으키도록 싫어하는 한국에서는 소개되지 않았을 것이고, 그것 말고도 검증된 치료법이 다양히 나와있을 것이다. 친구는 여러 병원을 전전하면서 절망적인 최후의 상태에서 이 요법을 마지막 대안으로 시행하게 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약이나 프로토콜의 약효 신빙성에 대한 것이 아니다. 나도 검증되지 않은 약은 굳이 좋아하지 않는다. 친구의 글을 통해 그녀의 치유의 과정을 읽어가면서, 치유에는 이 프로토콜 이외의 더 많은 것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고, 왜 이 프로토콜의 효과에 대해서 ‘플라시보 효과’로도 평가를 받는지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친구는 여러 다양한 기관을 거쳐 자신의 증상을 믿어주는 의사를 찾게 되고, 그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정기적인 소통을 한다. 그리고 남편과 가족들은 그녀의 다이어트과 치유에 대한 의지를 지지하고 도움을 준다. 친구는 도움을 청하는 법을 배우고, 자신을 직업이나 통장에 찍힌 급여액수 (숫자)와 동일시하지 않는 과정을 거치며, 뜨개질이나, 옷을 스스로 입는 것, 등 아주 작은 시도를 할 힘을 쌓아간다. 치유는 약물처방 등에 대한 것보다는 의사와의 소통에 중점을 두고 기록이 되며, 타이치 운동이나, 심리상담을 통해 내면의 분노를 찾아서 표출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또한 자신이 어렸을 적 좋아했던 그림을 그리는 일을 시작한다. 처음엔 생각한 것을 자유롭게 표현하지 못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렇게 자신을 이겨내고, 식단을 바꾸며 임신까지도 가능하게 된다. 임신에 대해서도 자신의 상태에서 아이까지 갖는다는 생각에 매우 회의적이고 부정적이었던 산부인과 의사를 ‘해고하고 (그녀는 부정적인 견해를 준 의사에게 환자가 의사를 ‘해고한다’는 것으로 자신의 감정을 글로 표현한다)’ 긍정적이고 에너지가 넘치는 젊은 다른 의사를 만나 결국 아이를 낳게 된다.
의료는 이런 부분에서 매우 어렵고 모호한 부분이 있는 것 같다. 같은 증상이지만 된다고 말하는 의사와 안된다고 하는 의사가 있다. 증상이라는 현상은 똑같고, 두 의사의 견해는 분명히 타당한 것이지만, 어느 선택을 하느냐는 힘든 것 같다. 같은 이를 두고도 뽑아야 한다거나 그냥 두라는 사람, 교정이 된다는 사람 안된다는 사람, 팔의 증상을 수술해야 한다는 사람과 수술은 안 하고 심지어는 혼자 나을 수 있다는 사람, 나도 겪은 이야기들이다. 위험을 감수하고 낫기를 원하는가에 대한 의지, 결과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있는 신뢰가 중요한 것 같다. 결국 사람과 사람의 일이 중요한 것 같다.
아프니까 쓸 수 없는 경우가 더 많겠지만, 글쓰기가 하나의 치료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또한 타인을 위한 자료로도 유용한 부분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아프다는 것은 단순히 아프다는 것 이외의 많은 의미들이 있다고 느낀다. 아프기를 원하지 않지만, 어쨌든 아무 기록이라도 쓰는 것을 포기하지 않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