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이 하나 둘 내 눈앞에 커지면서 다가온다.
넘어지기 전 매 순간이 스냅숏처럼 멈춰 선다.
무릎, 정강이, 아 이제는 손목, 그리고 손바닥
아아, 얼굴까지는 가지 않겠군.
피부가 많이 쓸리고, 피가 약간 배어 나오고 있겠군.
잠시 후면 쓸린 부분이 부풀어 오르다가
퍼렇고 붉은 멍이 들겠군.
쓰라린 고통이 밀려오지만 힘을 내자.
아무렇지 않은 듯 주위를 살피자.
설마 저 많은 창문들 중
우연히 일하다가 밖을 내다보는 감수성 풍부한 직장인은 거의 없겠지.
세 걸음, 두 걸음, 아, 한 걸음만 더.
드디어 차문을 열고 시동을 켠다.
이 엄청난 상처를 차 안에서 대충 마주할 수는 없지.
어쩌면 그냥 울어버릴지도 모르니까.
붉게 부릅뜬 더딘 신호등과
가슴 철렁거리게 만드는 꿀렁거리는 턱을 지나
드디어 방문을 열고 온전한 나만의 공간에서
내내 욱신거리는 느낌으로 그려졌던
처참할 것이 뻔할 상처와 마주하는
두려운 직시의 순간
어?
분명 쓰라렸던 손목은 흙 알갱이 하나만큼도 긁히지 않고 멀쩡하다.
분명 찢어졌을 거라 생각한 치맛자락은 먼지 하나 없이 멀쩡하다.
무릎은 쓸려서 피가 베인 건 맞지만 벌써 지들끼리 아물고 굳어가고 있다.
정강이는 각질 한 장의 두께만큼 벗겨져 있을 뿐,
이리저리 둘러봐도 멍 자국 하나 없다.
분명 난 뼈와 계단의 모서리가 부딪히고 쓸리는 둔탁한 느낌을 기억하는데 말이다!
그리고, 나는 하루 종일 괜히 기분이 좋다.
어렸을 적 새해 첫날, 그 해는 무릎이 깨지지 않기를 소원했다.
늘 조심을 해도 무릎에는 상처가 생겼다.
언젠가 더 이상 상처가 생기지 않았을 무렵부터
나도 모르는 새 어른이 되었던 것 같다.
이제는 어떻게 하면 넘어지지 않을지 요령을 터득한.
나는 아직도 넘어져 무릎을 다칠 수 있는 사람이고,
멍보다는 딱지가 먼저 생겨 아물 수 있는 사람이고,
냉랭한 계단의 모서리보다도 강한 뼈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
하루 종일 기분이 좋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