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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래몽상가 May 07. 2023

조선왕조실록을 지켜온 사고(史庫) 그 눈물겨운 역사

-세종대왕의 신의 한 수와 실록 지킴이의 분투적 헌신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부터 철종까지 472년간의 역사를 편년체(일어난 순서대로 역사적 사실을 기술하는 방식)로 기록된 문서로, 1997년 10월에 훈민정음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왕이 서거(逝去)하고 나서 다음 왕이 즉위하면 실록청(實錄廳)이라는 임시 기관에서 편찬을 진행하였다. 편찬을 위해 사관(史官)이 작성한 사초(史草, 사관(史官)이 기록해 둔 사기(史記)의 초고)와 시정기(時政記, 시정(時政) 가운데 역사에 남을 만한 자료를 추려 사관(史官)이 기록한 것), 승정원(承政院)일기, 일성록(日省錄)과 개인 문집 등이 활용되었다. 특히, 왕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실록이나 사초를 볼 수 없게 하여 사관들이 공정하게 역사를 기록할 수 있게 하였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실록은 봉안(奉安, 왕실의 중요한 기록이나 제사에 관련된 물건을 보관)하는 의식을 거친 후 춘추관과 지방의 사고에 각 1부씩 보관하였다. 


 조선 건국 당시 사고는 한양의 춘추관사고와 충주의 충주사고 2곳뿐이었다. 춘추관사고는 내사고(內史庫), 충주사고는 외사고(外史庫)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태조~태종실록은 외사고인 충주사고에만 보관하고 있었다. 그래서 실록의 소실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해 세종대왕은 성주와 전주에 새로 사고를 짓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를 제외한 3곳 모두 소실(消失)된다. 다행히 전주사고본을 잘 지켜낸 덕분에 임진왜란 이후 총 5곳의 사고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실록은 또 한 번의 위기를 겪게 된다. 이처럼 조선왕조실록이 우리나라의 가슴 아픈 역사와 함께하며 끈질긴 생명력으로 우리 곁에 숨 쉬고 있을 수 있는 이유는 세종대왕의 결정과 실록 지킴이들의 분투적인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1. 세종대왕의 첫 번째 신의 한 수 성주사고와 전주사고를 새로 짓다!

 1439년(세종 21년) 사헌부에서는 사마천이 <사기>를 짓고 원본은 명산(名山)에 간직하고 부본(副本, 원본의 훼손에 대비하여 원본과 동일한 내용을 예비로 보관하고 있는 문서)은 서울에 두라고 했다고 하면서, 실록 및 경서(經書)와 같은 중요한 문서가 보관된 청주사고가 백성이 사는 민가 가까이에 있어 화재의 위험이 있으니 이에 대비해야 한다는 상소문을 올린다. 세종대왕은 당시 19건의 상소문이 올라왔지만 사고 신축과 관련된 것만 승인해 경북 성주와 전북 전주에 사고(史庫)가 지어지고, 4년 뒤인 1445년(세종 27년)부터 실록을 보관할 수 있게 되었다. 

춘추관에서 아뢰기를, "청하옵건대, 경상도 성주와 전라도 전주에 사고(史庫)를 지어서 전적(典籍, 서책)을 간직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세종실록 86권> 재위 21년(1439년) 7월 3일

 그러나, 전주사고의 경우 실록을 보관하는 실록각(實錄閣)이 없어서 전주성 내 승의사(僧義寺)에서 보관하고 있다가 1473년 5월에 경기전(慶基殿, 태조의 어진(御眞, 임금의 사진)을 모시던 곳) 동편에 실록각이 완성되자 전주사고로 다시 옮겨왔다. 경기전과 전주사고가 있는 곳이 바로 지금의 전주 한옥마을이다. 이로써, 춘추관과 청주·성주·전주사고 총 4곳에 나누어 실록을 보관할 수 있게 되었다. 세종의 첫 번째 신의 한 수가 된 셈이다.


 #2. 세종대왕의 두 번째 신의 한 수 전주사고에 전직(殿直배치를 승인하다!

 1442년(세종 24년) 세종은 태조의 어진을 모시는 곳 중 전라도 전주, 경상도 경주, 평안도 평양에 있는 전각은 이름도 없고 전직(殿直, 사당의 청소를 비롯해 제사 때 신주의 출납 등을 담당하던 직책)도 배치되어 있지 않다는 보고를 받는다. 세종은 전주에 있는 전각을 경기전으로 이름을 짓고 전직을 2명씩 배치하라는 의정부의 건의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전직에게 어진은 물론 시설물 관리와 경계 임무가 주어졌지만, 엄밀히 따지면 실록을 지키는 일은 그의 소관이 아니었다. 그러나, 세종의 이번 결정 또한 조선왕조실록을 지킬 수 있었던 두 번째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의정부에서 아뢰기를......(중략) "전라도의 전주·경상도의 경주·평안도의 평양에도 영전(影殿, 임금의 초상을 모신 전각)이 있지만, 칭호(稱號)가 없으며, 또 전직(殿直)도 없으니 전주에서는 경기전(慶基殿)이라 일컫고, 경주에서는 집경전(集慶殿)이라 일컫고, 평양에서는 영숭전(永崇殿)이라 일컫게 하고는, 각기 전직(殿直) 두 사람을 두게 하고, 감사(監司)로 하여금 그 전직의 성적을 심사하여 우열(優劣)을 정해 보고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세종실록 96권> 세종 24년(1442년) 6월 22일

 #3. 세조가 놓친 신의 한 수 양성지의 건의

 조선 건국 당시 2곳뿐이었던 사고가 세종 때 4곳으로 늘어났지만, 여전히 화재와 약탈에 의한 소실 위험에 대한 우려가 끊이질 않았다. 그리하여 1466년(세조 12년) 당시 대사헌(大司憲, 지방행정의 감찰과 고발을 담당하는 사헌부의 수장으로 오늘날 검찰총장 같은 역할) 양성지가 세조에게 상소문을 하나 올린다. 왜구의 침입과 화재에 대비해 전주사고는 지리산으로, 성주사고는 금오산으로, 충주사고는 월악산으로 옮기고, 사찰에 의해 관리토록 하며, 해당 지역 백성들에게 경계와 감시 임무를 맡겨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실록에 기록된 양성지의 상소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외방의 3사고(史庫)는 서적(書籍)을 수장하는 곳인데 모두 관사(官舍)에 붙어 있어서 매우 엄밀(嚴密)하지 못하니, 다만 화재가 염려될 뿐 아니라 또 후일(後日) 외구(外寇, 외국에서 쳐들어오는 적)의 염려도 있습니다. 빌건대 관원을 보내어 자세히 살피게 하고 인구(人口)가 서로 떨어진 곳을 가려서 이를 옮기도록 하소서. 혹은 전주의 사고(史庫)를 남원의 지리산에 옮기고, 성주의 사고(史庫)를 금오산에 옮기며, 충주의 사고(史庫)를 월악산에 옮기게 하되, 모두 사찰(寺刹)에 의하게 하며 이에 위전(位田, 각릉·원·묘 등의 제사 비용, 기타 경비에 쓰기 위해 설정된 토지)을 주고 또 가까운 마을의 민호(民戶, 백성이 사는 집)로 하여금 이를 지키게 한다면, 이는 진실로 명산(名山)에 수장하는 뜻이 될 것입니다."  -<세조실록 40권> 재위 12년(1466년) 11월 17일  

 그러나 안타깝게도 양성지의 건의를 세조는 들어주지 않았다. 그의 우려대로 1538년(중종 33년) 11월에 발생한 화재로 인해 성주사고에 보관 중이던 실록 전부가 소실되고,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인해 전주사고본을 제외한 모든 실록과 사고는 잿더미가 되어버린다. 전주사고본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다름이 아닌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錄)이라는 두 명의 실록 지킴이 때문이었다는 사실이 그들의 행적을 소상히 기록한 <임계기사>라는 고문서가 발견되면서 알려졌다. 1592년 임진년과 1593년 계사년에 있었던 기록임을 의미하는 <임계기사>는 안의의 후손들이 집안 대대로 보관해오다가 정읍시립박물관이 건립된다는 소식을 접한 어느 후손이 2011년 정읍시에 기탁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4. 전주사고본을 지켜낸 실록 지킴이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錄)

 왜적의 침입 소식을 전해 들은 안의(1529~1596)와 손홍록(1537~1610)은 전주사고에 보관 중이던 실록과 태조의 어진을 지키기 위해 경기전으로 달려왔다. 손홍록은 56세, 안의는 64세로 당시로서는 꽤 나이가 많은 선비들이었다. 당시 경기전의 전직(殿直, 사당의 청소를 비롯해 제사 때 신주의 출납 등을 담당하던 직책)이었던 오희길과 상의한 끝에 이들은 태조의 어진과 실록(태조~예종)을 비롯한 각종 서적 1300여 권을 소와 말 30여 마리에 싣고 정읍에 있는 내장산으로 향했다. 이날은 1592년 6월 22일로 2018년 문화재청에서는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위대한 문화유산을 지켜낸 이들의 공로를 기념해 이 날을 ‘문화재 지킴의 날’로 제정하였다. 

 이들은 힘겹게 내장산 은봉암(隱峰庵)에 도착했지만,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해 더욱 험준한 곳에 보관하기로 하여 7월 1일 용굴암으로 옮겼다가 9월 28일에 비래암으로 다시 옮겼다고 한다. 특히, 안의와 손홍록은 1592년 6월부터 1593년 7월까지 무려 1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숙직하면서 실록과 어진을 지켜냈다고 한다. 그리고, 1593년 7월 이들이 지켜낸 실록과 어진은 선조의 명에 따라 충청감사 이산보에게 안전하게 인계되어 이제는 개인이 아닌 국가에서 문화유산을 관리하게 되었다. 

<내장산 용굴암>

 하지만, 1596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조정은 전주사고본을 해주로 보내고, 해주에서 다시 강화로, 강화에서 다시 묘향산 보현사로, 보현사에서 다시 강화로 여러 차례 옮겨지는 험난한 여정을 하게 된다. 이렇게 여러 번 옮겨졌음에도 불구하고 습기에 의한 피해는 거의 입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실록의 피난길을 함께한 지킴이들의 노력과 정성 덕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실제로 전주사고본의 피난길에는 언제나 안의와 손홍록이 함께했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안의는 1596년 9월 68세로 세상을 떠나 묘향산까지는 함께 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왜란 중에도 지켜낸 전주사고본을 원본으로 하여 1603년부터 3년의 노력 끝에 1606년에는 복사본 3개와 초본 1개 등 총 5개의 실록을 보유하게 되었다. 또한, 실록의 복사본이 완성되는 시기에 맞춰 이를 보관할 수 있는 5개의 사고도 새로 지어졌다. 


 만약 임진왜란 초기에 실록을 내장산으로 옮기지 않았다면, 태조 이성계부터(1392년) 명종 때까지(1567년) 175년에 해당하는 조선의 역사는 물론 세종대왕의 업적들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실록 지킴이들에게 우리가 깊이 감사해야 하는 이유이다. 안의와 손홍록은 목숨을 걸고 사초를 작성하는 사관 만큼이나 투철한 사명감이 있었지만, 이들과 너무 다른 행보를 보인 사관들도 있다. 조존세, 박정현, 임취정, 김선여 등은 임진왜란 때 사초를 불태우고 도망가버린 사관들이다. 사관 4인방으로 불리는 이들 때문에 선조 즉위년(1567년)부터 임진왜란 직전인 1591년까지 25년간의 기록은 지금도 남아 있지 않다. 임진왜란 때 왕은 나라를 버렸고, 사관은 사초를 버린 셈이다. 그런데, 우리가 사관 4인방의 존재를 알 수 있는 건 바로 실록에 그들을 벼슬 명단에서 삭제해야 한다는 기록이 다음과 같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될 만한 충분한 이유이기도 하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사관(史官)은 일을 기록하는 것으로 직분을 삼기 때문에 좌우에서 떠나지 않고 말과 행동을 반드시 기록해야 하는데, 주서(注書) 임취정(任就正)·박정현(朴鼎賢), 검열(檢閱) 조존세(趙存世)·김선여(金善餘)등이 안주(安州)에서부터 서로 이끌고 도망하였으니 일을 기록하는 직무가 폐지되고 시행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전고에 없던 일이니, 모두 사판(仕版, 벼슬아치의 명부)에서 삭제하도록 명하소서." - <선조실록 27권> 선조 25년(1592년) 6월 29일 

#5. 조선 후기 4대 사고와 수호사찰

 이렇게 어렵게 지켜낸 전주사고본 덕분에 1606년에는 실록청의 건의를 받아들인 선조에 의해 조선왕조실록을 ①춘추관사고(훗날 이괄의 난으로 소실), ②태백산사고, ③묘향산사고(훗날 적상산사고로 이관), ④마니산사고(훗날 정족산사고로 이관), ⑤오대산사고 5곳에 보관할 수 있게 되었다. 아래는 당시 실록청의 건의가 기록된 선조실록의 내용이다.    

실록청이 아뢰기를, "<실록>은 지금 봉심(奉審, 왕명을 받들어 보살피고 점검함)하고 분류하였습니다. 구건(舊件)은 그대로 강화(江華)에 보관하고 새로 인출(印出, 글씨나 그림을 찍어냄)한 3건은 춘추관(春秋館) 및 평안도 묘향산(妙香山)과 경상도 태백산(太白山)에 나누어 보관하고, 방본(傍本, 교정본) 1건은 바로 초본(草本)인데 지금 보관할 만한 지고(地庫, 무언가를 넣어 둘 수 있게 만든 땅속의 광)가 없으나 그냥 버리기가 아까우니, 강원도 오대산(五臺山)에 보관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길일을 이미 가렸으니, 당상(堂上, 정상품 이상의 품계에 해당하는 벼슬)과 낭청(郎廳, 실록청 등 임시기구에서 실무를 담당하던 벼슬)을 속히 나누어 보내 장마 전에 봉안(奉安, 왕실의 중요한 기록이나 제사에 관련된 물건을 보관)해야 하겠기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 <선조실록 199권> 선조 39년(1606년) 5월 7일 

 그러나, 5곳의 사고에 보관하고 있던 실록의 운명은 또 한 번 고초를 겪게 된다. 한성에 위치한 내사고인 춘추관사고는 1623년 이괄의 난으로 완전히 소실된 이후 복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묘향산사고는 왜적의 침입과 화재 위험에 대비해 1663년(인조 11년) 무주의 적상산으로 옮기게 된다. 마니산사고는 1653년(효종 4년)에 화재로 인해 대부분 소실되었으나, 1660년(현종 1년)에 강화도 정족산으로 옮김으로써 조선 후기 4대 사고(태백산, 적상산, 정족산, 오대산)는 일본에 의해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유지된다. 그뿐만 아니라, 양성지가 140년 전에 건의했던 대로 각 사고들을 지키는 수호사찰도 임명되었다. 태백산은 봉화의 각화사, 적상산은 무주의 안국사, 정족산은 강화도의 전등사, 오대산은 평창의 월정사가 각각 수호사찰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지금은 태백산사고를 제외한 3개의 사고는 모두 복원되었다. 


<조선 후기 4대 사고>

 태백산사고 복원사업은 여러 차례 시도되긴 했으나, 수호사찰이었던 각화사와 조계종단의 반발로 복원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이 그토록 귀하게 여기며 지켜온 문화유산을 수호사찰까지 임명하고 사찰을 중심으로 수호군을 조직한 이유가 궁금해진다.


 #6.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맞는 사고   

 조선이 일본에 의해 강제합병되자 태백산·정족산·오대산사고본은 서울로 이관되어 조선총독부가 관리하게 된다. 1914년 조선 총독 테라우찌에 의해 오대산사고본은 동경대학(현재 도쿄대학)으로 반출되었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거의 손실되고, 남아 있던 74권의 실록은 2번에 걸쳐 한국으로 반환되었다. 첫 번째 반환은 1932년 경성제국대학(현재 서울대학교)으로 24권 분량이 반환되었다. 두 번째 반환은 2006년에 이루어졌는데 조선왕조실록이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지 9년이 지난 시점에 그것도 도쿄대가 서울대에 학술교류 목적의 기증 방식으로 돌려받았다고 한다. 임진왜란 기간에도 조선의 책들을 그렇게 많이 가져갔다고 하는데, 당시 그 임무를 담당했던 일본 군인들은 글을 제대로 읽고 쓰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글도 모르면서 남의 나라 책들을 훔쳐 가고 그것도 모자라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문화재를 약탈해놓고 반환이 아닌 기증을 한다고 하니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는 말이 절로 생각난다. 적상산사고본은 유일하게 일본으로 넘어가지 않았지만, 한국전쟁 당시 행방이 묘연해졌다가 북한에서 이를 보관하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고, 현재는 평양의 김일성대학에서 보관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의 지독한 역사와 함께한 실록의 험난했던 여정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아래 그림과 같다.

<조선왕조실록의 역사적 이동경로>


#7. 남과 북을 연결하는 실록 탐방로를 꿈꾸며   

 조선의 500년 역사를 담은 기록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고, 누구든지 인터넷으로 실록을 볼 수 있게 된 것은 세종대왕과 전주사고본을 목숨 걸고 지켜낸 안의와 손홍록 같은 인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디지털 시대에 살고 있어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했던 방식으로 국가와 개인의 기록을 남기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방법과 형태든 간에 우리는 역사에 관한 모든 기록을 소중히 다루고 목숨 바쳐 지키려 했던 선조들의 정신은 잊지 말아야 한다. 전주사고본을 내장산으로 옮긴 날인 6월 22일을 문화재 지킴이의 날로 지정하고, 내장산에 실록 탐방로를 만들고, 사고를 복원해 우리의 위대한 역사를 지역별로 홍보하는 일은 큰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바람이 있다면, 남과 북을 넘나들며 이동했던 조선왕조실록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탐방로가 남북 합작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영변 묘향산에서 무주 적상산까지 이어지는 실록 탐방로가 만들어진다면, 남북통일이라는 더 큰 그림도 상상해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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