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부모님을 따라 성당을 다녔는데, 세례를 받고 나서 신부님의 미사 집전을 도와주는 복사(服事, Altar server)를 했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주말에 성당을 가끔 나가기는 했지만, 미사는 뒷전이었고 친구들과 놀던 기억이 더 많다. 어릴 적 성당은 영적 수련장이 아니라 놀이터에 가까웠다. 그러다 내가 사관학교에 입교해 어릴 적 다니던 같은 성당을 가게 되었고, 부모님도 시골로 귀농하시기 전까지 꽤 오랫동안 같은 성당을 다니셨다. 그 당시 인연을 맺었던 수녀님들과 지금까지도 정기적인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꼬마였던 내가 이제는 40대 중반에 두 딸의 아빠로 성장해 가는 모습을 지켜보시던 수녀님들도 이제 70세가 훌쩍 넘으셨다. 그저 편안한 수녀님으로만 기억되던 분들이었는데, 이해인 수녀님의 책을 읽고 난 후 이제는 진정한 성직자로 보인다. 그분들이 보시면 서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죄송한 마음으로 책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언제부턴가 시대를 초월하는 큰 가르침에 목말라했고, 독서를 통해 빨리 그 갈증을 채우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삶의 경험과 지혜가 담겨 있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찾아 나서게 되었다. 그 갈증을 채우기 위해 떠난 여행길에서 이해인 수녀님을 만났다. 예전에 수녀님의 <기다리는 행복>이라는 책을 통해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어 이번 만남은 낯설지 않았지만, 또 어떤 가르침이 나를 기다릴까 하는 설렘이 앞섰다.
<이해인의 말>은 이해인 수녀님과 재미 저널리스트 안희경 작가와 서로 주고받은 이야기를 대화형식으로 정리한 책이다. 코로나로 인해 화상 인터뷰로 진행되었다고 하는데, 읽다 보면 꼭 수녀님과 내가 대면으로 대화를 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생동감이 있다. 50여 년의 수도 생활을 하시는 동안 만난 사람들과의 이야기, 세상에 남기고 싶은 가르침, 여성 수도자의 생활 등이 담백하게 전해온다.
어떤 자세와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행복할 수 있고,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가르침은 세상에 넘쳐난다. 언제나 그렇듯, 행동으로 실천하느냐의 문제가 남는다. 어쩌면, 이해인 수녀님의 가르침도 아주 평범할 수 있지만, 수녀님의 진실한 마음과 참된 행동으로 보여주신 가르침의 무게는 절대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이해인 수녀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영혼이 맑아지는 느낌이 들고, 지금 나에게 주어진 상황들을 긍정하게 되고, 그 속에서 작은 감사를 찾게 된다. 아름답고 가슴 뭉클한 이야기들이 많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책 속 수녀님의 가르침이 있다면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평가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수녀님도 그 가르침을 잊지 않고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신다고 한다. 수녀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낯선 이를 냉대하지 말라. 천사일지 모르니.”라는 격언이 너무 좋아 붓글씨를 잘 쓰는 분께 부탁하여 책상에 두었다고 한다. 본인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불친절해지고 냉대하고 싶어질 때 되새기려고 부탁해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함부로 상대방을 평가하거나 판단하지 말라는 오래된 지혜이지만, 수녀님도 실천하는 게 자신이 없으셨던 걸까? 그리고 수녀님은 종교학에서 배운 ‘판단 보류의 영성’이라는 이론을 설명하신다. 남을 탓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돌아보고 객관화하는 자세로 남을 함부로 평가하지 말라는 가르침이라고 한다. 로젠버그 박사의 <비폭력 대화>에서도 평가하기 전에 충분히 관찰하라는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왜 이해인 수녀님을 선택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아마 직관에 따라 고른 책들을 순서대로 나열해 보고, 읽으며 남긴 상념의 흔적들을 회상해보면 알게 되지 않을까? 수녀님과의 짧은 만남이 끝나갈 무렵, 문뜩 법정 스님이 떠올랐다. 수녀님은 법정 스님께서 하신 “내 속의 뜰을 잘 가꾸자”라는 말을 참 좋아하셨다고 한다. 수녀님은 내 속의 뜰을 잘 가꾸려면 끊임없이 사색하고 책을 많이 읽고, 잘 웃고, 삶을 긍정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그러다 보면 삶에 대한 설렘이 생기고 재밌어진다고 말씀하신다. 나도 내 속의 뜰을 잘 가꾸고자 자연스럽게 다음 정차역은 법정 스님으로 정했다. 얼마 전 법정 스님 입적 10주년을 기념해 스님께서 남기신 글을 모아 놓은 <스스로 행복하라>를 다음 정차역을 향한 안내서로 선택했다.
언제 이 여행이 끝날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죽을 때까지 방황하는 여행이 되겠지만, 그게 언제가 되었든 이해인 수녀님께서 건강하게 오래 살아계시면서 내 여행의 나침반이 되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 사진 속 어린아이가 수녀님의 등에 올라타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듯이, 이 세상의 큰 어른으로서 언제나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으로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