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다임(paradigm)의 전환
토마스 쿤(Thomas Samuel Kuhn)
토마스 쿤(Thomas Samuel Kuhn, 1922~1996)은 1943년 하버드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2년간 미국의 무기 관련 연구소(OSRD, Office of Scientific Research and Development)에서 근무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쿤은 다시 하버드에 들어가 1949년 물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박사과정 중 당시 하버드대 총장 제임스 코난트(James B. Conant, 1893~1978)가 개설한 ‘자연과학개론’ 강의를 돕게 되면서 과학사 연구에 빠지게 된다. 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을 읽고, 어떻게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위대한 철학자가 자연과학에 대해 그렇게 잘못된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심각한 의문을 갖게 되었다. 이후 쿤은 과학사 연구를 통해, 과학의 발전은 지식의 점진적 축적이 아니라 새로운 과학의 틀이 등장하여 혁명적으로 변화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난해한 책, 명료한 핵심요약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는 20세기 과학철학의 고전 중 하나로 손꼽히는 책으로 원서와 번역본 모두 매우 난해하기로 유명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패러다임(paradigm)이라는 말은 누구나 알고 있다. 꼭 책을 다 읽어야 쿤이 주장하는 패러다임의 개념을 논할 자격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쿤의 철학을 나의 것으로 소유하여, 이를 나만의 언어와 해석으로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 싶어 도전해 보았다.
공유하고 싶은 책의 핵심내용은 아래 그림 하나로 아주 명료하게 요약이 된다. 물론, 쿤은 자신의 책에 아래와 같은 간단한 그림이나 표로 자기의 철학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누군가가 인터넷에 공유한 그림이다. 앞에서 말한 읽기와 쓰기의 목적에 충실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쿤이 주장하는 과학혁명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어떤 패러다임이 자리를 잡고 있을 때 사람들은 그 패러다임으로 모든 자연현상을 설명하려고 한다. 그런데, 설명할 수 없는 이상현상(또는 변칙현상)이 관측되어 기존 패러다임에 위기가 찾아온다. 그러면서 어떻게든 기존의 패러다임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려 하거나 이상현상을 아예 무시해버리는 일들이 일어난다. 기존의 패러다임을 지지하던 과학자들과 새로운 패러다임을 지지하는 과학자들 간에 거의 전쟁에 가까운 논쟁이 일어난다. 그러다가 새로운 과학의 틀(즉, 패러다임)이 등장하여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 새로운 정상과학이 자리를 잡게 된다. 다음의 3가지 개념을 이해하면 쿤이 말하는 과학혁명의 구조와 그 과정이 좀 더 명료해질 것이다.
공약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 정상과학(normal science), 패러다임(paradigm)
(공약불가능성) 쿤은 경합하는 두 패러다임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공약불가능의 관계에 있다고 보고, 그 둘이 같은 기준으로 비교되거나 평가될 수 없다고 말한다. 쿤에 의하면, 서로 다른 패러다임 속에 있는 과학자들은 같은 현상을 다른 시각으로 보고, 문제 해결 방식도 다르며, 같은 용어에 대한 의미도 다르게 해석하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포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설(천동설)이 폐기되고 갈릴레이 갈릴레오의 태양중심설(지동설)이 받아들여진 천문학 혁명이다.
예를 들어, 포톨레마이오스의 패러다임에서 행성의 의미는 태양을 포함하고 지구는 포함하지 않았던 반면, 코페르니쿠스의 패러다임에서 행성은 그 반대의 의미로 해석되었다. 즉, 태양은 제외하되 지구는 포함시킨 것이다. 이처럼, 천동설과 지동설이라는 두 패러다임은 행성이라는 같은 용어에 대한 의미를 다르게 해석하였기 때문에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공약불가능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천동설과 관련된 과학적 틀로는 설명할 수 없었던 관측들이 지동설과 관련된 과학적 틀로 입증이 되었기 때문에, 이 둘은 공약불가능한 관계로 보았으며, 바로 그 과학적 틀을 패러다임이라고 부른 것이다.
(패러다임) 쿤은 ‘패러다임이란, 어떤 과학자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믿음, 가치, 테크닉 등을 망라하는 총체적인 집합’이라고 정의하고 있다(p.74). 그리고 과학혁명은 바로 이 패러다임의 변화를 뜻한다. 쿤은 현재를 지배하고 있던 하나의 틀이 버려지고 새로운 틀의 탄생이 마치 정치적 혁명과 같다고 보고, 이를 과학혁명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정치적 혁명과 사회구조의 변화는 언제나 기존 시스템과의 충돌이 일어나면서 갈등과 경쟁 그리고 마찰이 수반된다. 과학혁명도 마찬가지로 기존의 패러다임을 고수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거부하는 과학자들이 늘 존재해 왔다. 예를 들어, 막스 아브라함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고, 아인슈타인도 양자역학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이처럼 패러다임은 엄청난 무게가 있는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정상과학) 쿤은 특정한 패러다임을 받아들이고 그 패러다임 안에서 연구하는 과학을 정상과학이라고 불렀다. 그는 ‘정상과학은 패러다임이 미리 만들어 놓은 비교적 경직된 상자에 자연을 처넣으려는 노력이다’라고 다소 과격하게 표현하기도 했다. 그래서 많은 과학자로부터 비판을 받았지만, 그만큼 어떤 패러다임이 자리 잡게 되면 모든 자연현상을 그 틀 안에 맞추려고 한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뉴턴 역학이 대표적인 정상과학의 사례이다. 물질의 모든 운동이 뉴턴의 운동법칙에 의해 설명되자 세상은 뉴턴 패러다임에 빠지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패러다임에서 뉴턴의 패러다임으로의 혁명적 변환이 일어난 것이다.
뉴턴의 패러다임이 영원할 것 같았지만, 태양계의 8번째 행성인 해왕성(Neptune)이 발견되는 과정에서 뉴턴의 정상과학은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1781년 3월 13일 영국의 천문학자 윌리엄 허셜(Friedrich William Herschell, 1738~1822)은 자신이 만든 망원경으로 태양계의 7번째 행성이자 두 번째로 큰 천왕성(Uranus)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다년간 관측을 해보니 천왕성의 공전주기가 뉴턴 역학으로 계산한 결과와 맞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뉴턴의 패러다임을 믿었던 천문학자들은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기 위한 연구보다는 뉴턴의 기존 이론이 맞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보조가설(또는 임시방편 가설)을 만들어 연구를 진행하였다. 바로 르베리에(1811~1877, 프랑스의 천문학자)와 애덤스의 해왕성의 가설이다. 즉, 천왕성의 궤도 이탈이 발생하는 원인은 뉴턴의 이론이 틀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 관측하지 못한 어떤 미지의 행성이 간섭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재밌게도, 뉴턴의 역학에 기초하여 해왕성의 위치를 예측해서 관측했더니 실제로 해왕성의 존재가 발견된 것이다. 뉴턴 역학을 보호하기 위한 임시방편의 가설이 과학의 발전을 이뤄낸 것이다. 이처럼 쿤은 패러다임이 큰 틀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면, 정상과학은 그 틀 안에서 퍼즐을 푸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패러다임의 전환이 어려운 이유
책을 읽으며 여러 가지 과학상식을 알게 되었지만, 깨달은 한 가지가 있다면 언제나 모든 문제는 내 안에 있다는 것이다.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거나 out of box 사고를 해야만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쉽지 않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쿤의 철학을 알게 되고 나서 왜 그런지 그 이유를 하나 찾았다. 왜냐하면, 패러다임의 전환을 말하는 나조차도 어쩌면 쿤이 말하는 정상과학을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정상과학이 자리 잡은 패러다임을 벗어나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어쩌면 착각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만큼, 나에게 지금 익숙하고 그동안 당연하게 생각해 왔던 경험과 상식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패러다임의 변화가 일어날 때, 엄청난 저항과 갈등이 일어난다. 미래를 향한 도전으로 인해 발생하는 현실에서의 변화를 유연하게 관리하는 전략이 병행되어야 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그러나, 내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성찰해보지 않고서는 어렵다. 다시 말해, 기존 패러다임을 고수하려는 쪽이면 사회나 국가에서 추진하는 새로운 정책에 대해 반감을 품을 것이고, 그 반대라면(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쪽이면) 기존 패러다임을 고수하는 세력이 걸림돌로 생각될 것이다. 결국, 내가 어떤 패러다임에 구속되어 있는지 끊임없이 되새기는 자기 성찰적 노력 없이는 패러다임의 전환은 일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비록 소수라 하더라도 함께 할 사람들이 있다면 그 어려운 일을 우리가 자꾸 해낼 수 있지 않을까? 미래를 멀리 내다보기 위해서는 그만큼 더 먼 과거를 돌이켜봐야 한다. 역사를 돌아보면 세상을 바꾼 인물들은 언제나 외로운 싸움을 오랫동안 했지만 함께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 가르침이 세대를 넘어 전해질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시대의 패러다임에 사로잡히지 않고, 다음 세대의 상식과 대화할 수 있었던 인물들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 어려운 패러다임의 전환을 시도했고 함께 도전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