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룡의 ‘징비록’이 임진왜란(1592~1597)에 대한 쓰라린 반성의 기록이라면, <대한민국 징비록>은 1543년부터 1910년 한일합방까지를 ‘징비(懲毖, 과거의 잘못을 경계해 미래를 삼가다)’의 관점에서 기록한 반성문이다. <조선의 못난 개항> (문소영, 2013)을 얼마 전에 읽고 근대화를 맞이하는 일본과 조선의 서로 다른 역사적 여정을 다녀온 이후여서 <대한민국 징비록>은 또 한 번의 충격으로 다가왔다. 1543년은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태양중심설)을 알리고, 일본이 총포를 수입하고, 조선이 서원을 설립했던 해이다. 저자는 왜 1543년에 주목하는가?
코페르니쿠스를 기리는 동상(폴란드 토룬 시청 앞)에는 “지구를 움직이고 태양과 하늘을 멈춘 사람’이라고 적혀있다. 1543년, 코페르니쿠스는‘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원래 제목은 ‘세계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uim mundi) 였다고 한다. 출판을 감독하던 루터파 어느 목사가 세계를 천구(orbium coelestium)로 바꾸었다고 한다. 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의 논문이 출판되기 전에 죽었기 때문에, 자기 논문이 바뀐 제목으로 지금 세상에 알려져 있는 것을 모를 것이다.
1000년 이상 천동설을 당연한 진리처럼 믿어왔던 사람들에게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은 당연히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1616년에 그의 논문은 로마 가톨릭에 의해 금서로 지정된다. 그의 유해는 사후 467년이 지난 2005년에 프라우엔부르크 대성당 밑에서 아래턱이 없는 두개골로 발견된다. 다음 세대에 통용될 상식과 대화한 인물들에 대한 역사적 대우는 지나치게 야박하다는 생각이 든다.
[출처 : 박종인의 땅의 역사(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1/09/2019010900043.html)]
1543년, 일본의 작은 섬 다네가시마(다네가 섬)에 포르투갈 상선이 도착한다. 당시 15살의 도주(島主:섬의 주인) 도키타카는 거금을 주고 두 자루의 물건을 구입한다. 이름은 철포라고 했는데, 지금은‘종자도총’또는‘조총’이라고 부른다. 도키타카는 철포 한 자루를 대장장이 야이타 긴베에게 주면서 이를 역설계하라고 명하고, 야이타는 국산화에 거의 성공하지만, 총열 뒤를 막는 나사 제조술을 만드는 데서 막힌다. 포르투갈인 제이모토에게 그 기술을 전수해 달라고 요청하자 야이타의 외동딸 ‘와카’를 자기한테 시집보내주면 알려주겠다고 하여, 결국 딸의 효심을 제물로 신기술을 얻게 된다. 다네가시마 섬에는 일본에 조총기술을 전수한 대장장이 야이타와 그의 딸 와카를 기념하는 동상과 추모비가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제주도 1/5 크기의 이 작은 섬에는 일본의 로켓 발사장인 다네가시마 우주센터가 있다. 일본은 1970년 이곳에서 최초로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하면서, 소련, 미국, 프랑스에 이어 세계 4번째 인공위성 발사국이 된다.
(대장장이 야이타 긴베 동상)
(와카의 무덤과 충효비)
1543년(중종 38) 풍기군수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을 설립한다. 서원은 선현(先賢, 옛날에 어질고 사리에 밝은 사람)을 배향하고 유생들을 가르치던 조선의 대표적인 사학교육 기관이다. 초창기의 서원은 인재 양성과 성리학에 기반한 사회질서 유지 등 긍정적 기능을 발휘했다. 그러나, 군역과 세금 면제의 혜택을 부여하던 의미가 퇴색되고, 혈연ㆍ지연과 당파로 연결되어 폐단을 일으키는 온상이 되었다. 1543년 일본은 조총을 만들었고 조선은 서원을 설립했다. 이미 조선은 기울고 있었다.
‘C4 J0 K21 O19’는 15세기 세계적인 과학기술의 성취 건수를 의미한다. 1983년, 이토 준타로 교수가 편찬한 <과학기술사사전>에 등장하는 이 암호와 같은 구절은 세종대왕 재위 시절에 이룩한 과학적 성과를 보여주는 자랑스러운 기록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세종대왕의 찬란했던 과학시대는 조선의 역사에서 실종된다. 자랑스러움이 부끄러움으로 바뀌었다. 15세기 중국(C)은 4건, 일본(J)은 0건, 조선(K)은 21건, 그 외 유럽 및 중동 등 기타 국가(O)는 19건의 성과를 이루었지만, 왜 일본은 27명의 노벨상 수상자가 있고 한국은 1명(고 김대중 전 대통령) 밖에 없는가?
연산군일기(1503, 연산 9)에는 함경남도 단천에 있는 탄광에서 김감불과 김검동이 납이 포함된 은광석에서 녹는점의 차이를 이용해 납을 산화시킨 후 은을 골라내는 기술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신기술을 ‘회취법(灰吹法)’이라고 부른다. 이 신기술은 1530년대에 일본으로 유출된다. 일본은 은광석을 배에 싣고 조선에 가져와서 제련하고 갈 정도로 은 제련기술의 수준은 상당히 낮은 편이었다. 그런데, 16세기말에 일본은 전 세계 은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세계 2위의 은 생산국이 된다. 은은 그 당시 지금의 달러와 같은 기축통화였다.
이익이 있는 곳에는 분쟁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일본 내 최대 은광인 ‘이와미 은광’의 채굴권과 소유권에 대한 쟁탈전의 최종 승리자는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된다. 임진왜란의 막대한 군자금이 이와미 은광에서 충당되었다. 1543년 다네가시마 도키타카가 총포 구입을 위해 지불한 거금(현재 시가 약 2억 엔 상당의 은)도 은이었다. 조선은 은 제련기술을 먼저 개발했지만, 조선의 성리학은 상업을 악으로 규정하고 과학기술을 질식시켰다. 일본은 조선의 기술을 훔쳐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이 돈으로 총포를 만들었고, 조선을 침략했다.
아리타 마을에는 조선의 천민 출신인 도공 이삼평을 기리는 ‘도잔신사(陶山神社)’가 있다. 충남 공주 출신의 이삼평은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갔다가 아리타 동부 이즈미산에서 고령토(백토)가 묻힌 광산을 발견하고, 대형 가마를 짓고 백자를 만드는 데 성공한다. 일본은 이삼평이 백자토를 발견한 1616년을 일본 백자의 원년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들이 전해준 기술로 만들어진 일본 백자는 17세기에 이르러 유럽에 알려지면서 수출까지 하게 된다. 일본은 자기를 팔아 번 돈으로 용광로를 만들고, 철을 생산한다. 조선의 가마 기술은 철을 녹이는 데 유용하게 사용된다. 일본은 철로 제작된 군함과 무기들을 생산하게 된다. 조선은 일본에 침략당하고 한일합병을 맞이하게 된다.
(아리타 주민이 세워준 이삼평 조각상과 기념비)
일본에 끌려간 도공 이작광은 조선으로 돌아와 동생을 데리고 다시 일본으로 간다. 다른 도공들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도공들이 조선에 다시 돌아오지 않은 이유는 ‘무본억말(務本抑末, 농업을 장하고 상업과 공업을 억제하는 정책)’ 때문이었다. 일본은 조선 도공들의 기술을 존중했고 그들을 극진히 대접했다. 이삼평은 일본에서 ‘도조(陶祖, 도자기의 조상)’로 불리며 그의 14대 후손은 지금도 아리타 마을에서 선대의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정작 우리나라는 고려청자나 조선백자는 계승자가 없어 대가 끊기고 있는 현실과 비교해 보면 너무 씁쓸해진다.
실패의 역사를 반성하고, 과거의 경고를 교훈 삼아 비극의 반복을 막기 위해서는 이 책을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진정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불쾌한 역사적 반성이 필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미래 세대가 우리가 살아왔던 시대를 돌이켜보며 ‘대한민국 징비록’과 같은 책을 다시 쓰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