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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래몽상가 Jul 07. 2024

왕 곁에 잠들지 못한 왕비들

  개인적으로 조선시대 역사에 관심이 많다. 조선의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특별한 이유는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위대한 기록 유산 덕분에 역사를 후대의 평가가 아닌 당대의 사실에 근거해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나의 고향인 경기도 여주에 잠들어 계신 세종대왕을 가장 존경한다. 백성들의 평범한 삶과 신하들의 신명 나는 공직 생활을 위해 비범한 노력을 기울인 군주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세종대왕은 많은 대한민국 국민이 가슴으로 기억하는 분이시다. 시대를 초월하는 가르침을 실천하셨고, 그 실천의 기록들이 남아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조선의 역사와 세종대왕에 관한 관심이 점점 옆으로 번지면서 언제부터인가 조선의 왕릉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42기의 조선왕릉 중 북한에 있는 2기의 왕릉(제릉 : 태조의 정비 신의왕후 한씨, 후릉 : 정종과 그의 정비 정안왕후 김씨)을 제외하고 대한민국에 있는 40기의 왕릉은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모든 조선왕릉 입구에는 아래 사진과 같이 ‘나는 세계유산이다’라고 자랑하고 있다.

 죽은 자들을 만나 살아있는 역사의 흔적을 직접 느끼고 싶어 시간만 나면 왕릉을 자주 찾아가곤 했다. 그런데, 한 번도 왕비의 관점에서 조선왕릉과 조선의 역사를 생각해보지 않았었다. 조선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왜 여자들은 이름이 없고 ‘무슨 무슨 씨’라고만 기록되어 있는지 살짝 의구심이 들긴 했었다. 그러다 「왕 곁에 잠들지 못한 왕비들」을 읽으면서 딸 바보 아빠로서 소홀히 지나쳤던 의구심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이번 책은 조선의 역사를 왕릉에 묻혀 있는 왕비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신선한 경험을 하게 해주었다. 덕분에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해준 숭고한 역사는 이 땅의 엄마, 딸, 아내들이 지켜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들의 기록이 많지 않다는 점이 안타깝다.


  북한에 있는 2개의 왕릉을 제외한 40기의 왕릉은 아래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대부분 서울을 중심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하루빨리 남북통일이 이루어져 북한에 있는 2기의 왕릉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를 희망해 본다. 조선에는 27명의 왕과 41명의 왕비가 있다. 27명의 왕 중 태조, 단종, 중종은 혼자 잠들어 계신 홀아비 3인방이다. 41명의 왕비 중 28명은 왕 곁에 잠들었고, 원비 8명과 계비 5명은 홀로 계신다. 왕 곁에 잠들지 못한 13명의 왕비 중 7명의 후궁은 왕의 아들을 낳아 그 아들이 왕위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왕 곁에 잠들지 못했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부분은 책 제목대로 왕 곁에 잠들지 못한 13명의 왕비들에 관한 이야기이고, 두 번째는 왕 곁에 잠든 왕비 28명의 삶을 들려주고 있다. 한 분 한 분의 삶은 곧 조선의 519년 역사라 할 수 있다. 28명 모두 기가 막힌 인생 드라마의 주인공들이지만, 1부(왕 곁에 잠들지 못한 왕비)와 2부(왕 곁에 잠든 왕비) 등장인물 중 가장 심금을 울렸던 몇 분만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왕 곁에 잠들지 못했고, 남편도 홀로 계신 태조, 단종, 중종의 부인과 왕 곁에 잠들었지만 편치 않을 숙종과 고종의 부인들에 관한 이야기다.



■ 왕도 왕비도 혼자 남은 밤

 이 시대의 영원한 가객으로 불리는 故 김광석의 노래 중 잘 알려지지 않은 ‘혼자 남은 밤’이라는 곡이 있다. 왕 곁에 잠들지 못했고, 본인도 홀로 잠드신 왕비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이 노래가 생각났다. 조선 27명의 왕 중 3명(태조, 단종, 중종)과 그의 부인들은 지금도 노랫말의 가사처럼 혼자 남은 밤을 보내는 자신의 모습에 더욱 쓸쓸해하며 봉침 앞 혼유석에 나와 환하게 밝아지는 눈물을 흘리고 있지 않을까? 왕 곁에 잠들지 못한 왕비, 왕비 곁에 잠들지 못한 왕들이 지금 김광석님의 노래를 듣는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김광석 <혼자 남은 밤>


태조(건원릉, 구리)의 원비 신의왕후 한씨(제릉, 개성)

 조선의 첫 번째 왕 태조 이성계에게는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 신의왕후 한씨는 이성계의 원비가 되었지만, 조선이 건국되기 1년 전에 돌아가셨다. 그녀는 결국 고려의 사람으로 태어나 고려의 사람으로 생을 마감했다. 다음 해에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라가 세워지자 태조보다 21세 연하였던 계비 신덕왕후 강씨가 조선의 첫 번째 왕비가 되었다.


 전장을 누비던 호족 출신의 이성계와 결혼한 원비 신의왕후 한씨는 6남 2녀의 자녀들을 극진하게 키우고 보살폈다. 그녀는 1388년 위화도 회군 당시 가족들의 생사가 위태로워질 것 같아 홀로 6남 2녀를 데리고 함경도 동북면으로 피신을 갔다. 그러나 조선 건국 1년 전인 1391년에 위장병이 악화되어 55세의 나이로 세상과 이별해야만 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아들 6명 중 2명이 조선의 왕이 되었다는 점과, 그들 사이의 권력투쟁을 직접 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남편도 계비에게 빼앗기고, 조선이라는 새 나라의 첫 번째 왕비라는 영예도 누리지 못한 것도 안타까운데 죽어서도 홀로 묻혀 계신다. 그나마 그녀의 둘째 아들 영안대군(제2대 왕 정종)과 며느리(정안왕후 김씨)가 같은 북녘땅에 있어서 다행이다. 신의왕후 한씨와 마찬가지 태조 이성계 역시 경기도 구리시 건원릉에 홀로 계신다. 519년이라는 긴 역사의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부부인데 한 곳에 같이 잠들지 못하셨다. 남과 북으로 갈라진 분단의 현실이 더 씁쓸하게 다가온다. 남과 북이 빨리 통일되어 두 분을 한 곳으로 모시게 될 날이 오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제릉(개성) / 건원릉(구리)


 단종(장릉, 강원도 영월)과 정순왕후 송씨(사릉, 경기도 남양주)

 단종(1441년~1457년)의 왕비 정순왕후 송씨(1440년~1521년)는 단종이 죽고 64년을 혼자 살다가 82세에 돌아가셨다. 단종의 이야기는 너무 잘 알려져 있다. 1452년 11살의 어린 나이에 단종은 아버지 문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지만, 정치적 힘이 너무 약했다. 결국 단종은 삼촌이었던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1453년)으로 재위 3년 만인 1455년에 권좌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사육신(성삼문, 이개, 박팽년, 허위지, 유성원, 유응부)이 주도하다가 적발된 단종 복위 운동 때문에 노산군으로 강등되고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었다. 조선왕조 최초로 폐위된 왕이 된 것이다. 그러나, 1457년 결국 유배지였던 영월 청령포에서 16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짧은 생을 마감한다. 단종의 죽음에 대해 다양한 주장들이 있지만, 오늘은 왕비의 삶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니 생략하고 ⌜단종의 비애 세종의 눈물⌟을 읽고 나서 상세히 다뤄보고자 한다.

단종의 유배지 청령포

 정순왕후 송씨는 1454년 14살의 나이에 한 살 연하였던 단종과 혼인해 왕비가 되었다. 하지만, 신혼 3년째였던 1457년에 남편과 헤어져야만 했다. 어린 남편 단종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자 정순왕후도 군부인(郡夫人, 군의 정실부인)이 되어 궁에서 쫓겨난다. 왕비께서 돌아가시고 177년이 지난 숙종 24년(1698년)에 단종과 함께 복위되었다. 품성이 어질고 매우 검소한 삶을 살아서 백성과 시녀들이 많이 따랐다고 한다. 그녀의 시호인 정순(定順)은 ‘어그러짐이 없고 화합한다’는 뜻이다. 정순왕후와 연관된 흔적들이 서울에 꽤 많다.  


 남편의 유배길을 배웅하던 정순왕후는 청계천 영도교(永渡橋)에서 헤어진 후 살아서도 죽어서도 만나지 못했다. 영도교는 단종과 정순왕후가 ‘영원한 이별을 한 다리’, ‘영영 헤어진 다리’ 등으로 불려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정순왕후는 매일 근처 산에 올라 영월 방향을 바라보며 남편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그 산봉우리를 동망봉(東望峯)이라고 한다. 동망봉은 1771년 영조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다. 정순왕후의 이야기를 들은 영조가 동망봉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바위에 글씨를 새기게끔 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시절 이곳이 채석장으로 바뀌면서 글씨를 새긴 바위가 사라졌다고 한다. 지금은 종로구 숭인공원에 동망봉 표지석과 동망정이라는 작은 정자가 있다.

청계천 영도교 / 동망봉 표지석 / 동망정

 정순왕후는 후궁이나 왕실가 출신들이 출궁해 머물던 정업원(淨業院)에서 생활했다고 한다. 정업원은 불교를 숭상하던 고려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래서인지 왕실에 시집갔다가 과부가 되거나 쫓겨난 부인들이 승려가 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당연히 유교 국가였던 조선시대에서 이는 반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그래서 정업원을 혁파해야 한다는 상소문이 자주 올라왔고 결국 선조 때 정업원은 철거되고 만다. 지금은 정업원이 있던 자리에 청룡사가 들어섰다. 청룡사에는 영조가 정순왕후가 머물렀던 곳임을 기리기 위해 친필로 작성한 비문이 새겨진 ‘정업원구기비(淨業院舊基碑)’라는 비석만 남아있다고 한다. 그리고 청룡사 안에는 정순왕후가 단종과 헤어지기 전 마지막 밤을 보냈던 우화루(雨花樓)도 남아있다고 만다. 우화루는 “꽃비가 내리는 누각” 이라는 의미이다. 눈물로 얼룩진 두 젊은 남녀의 슬픈 이별 이야기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세조는 처조카가 안쓰러웠는지 왕실의 곡식을 하사하고 따로 살 집도 마련해 주었으나, 정순왕후는 이를 일절 거부했다. 이 소식을 들은 동네 여인들이 여자들만 다니는 시장을 열어 그곳에서 구해온 음식을 먹고 지냈다고 한다. 여인시장이라 불리던 이곳을 기념하는 표지석은 현재 없어졌다고 한다. 여인시장이 바로 지금의 동묘벼룩시장 자리라고 한다.


 정순왕후와 단종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왕후가 홀로 60여 년이 넘는 세월을 살다가 돌아가시자 묘자리를 정할 사람이 없었다. 다행히 단종의 누나였던 경혜공주의 시댁(해주정씨 집안)에서 정순왕후의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에 있는 해주정씨의 묘역에 조성된 정순왕후의 묘는 훗날 오랜 시간 남편을 늘 생각했다는 뜻의 ‘사릉(思陵)’이라는 능호를 받았다.

  원래 왕릉이 조성되면 인근 10리(약 4km)안에 있는 마을은 강제로 옮겨야만 했다. 그러나, 정순왕후가 이를 원치 않을 것이며 해주정씨 묘소를 이장하면 정순왕후의 마음도 편치 않을 것이라는 신하들의 간청을 숙종이 윤허했고, 해주정씨 묘역을 그대로 보존했다고 한다. 조선왕릉 중 유일한 사례이다.                                                     


   단종은 강원도 영월 장릉에 있어 두 사람은 죽어서도 만나지 못하고 있다. 단종이 있는 장릉과 정순왕후가 있는 사릉의 소나무들조차 서로를 바라보며 서 있다고 한다. 남편과는 그토록 멀리 떨어져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세조가 잠든 광릉(光陵)과는 불과 자동차 30분 거리에 있다. 세조가 죽고 정순왕후는 53년을 더 살았다. 과연 정순왕후는 자기 남편에게 사약을 내린 세조를 보며 53년 동안 무슨 생각을 했을까?




7일의 왕비 단경왕후 신씨(온릉,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단경왕후 신씨(1487~1558)는 조선의 11대 왕인 중종의 원비이다. 1499년 13세의 나이로 1살 연하였던 진성대군과 결혼한 그녀는 1506년 20살이 되던 해에 일어난 중종반정으로 인해 조선 11대 왕 중종의 왕비가 된다. 그러나 조선의 역대 왕비 중 왕비로서 살았던 삶이 가장 짧은 여인으로 역사에 기록되고 만다. 반정에 성공한 남편 진성대군이 왕이 되어 중종으로 즉위하자 그녀도 왕비가 되었다. 하지만, 7일 만에 폐위되고 만다. 2017년 KBS에서 방영한 <7일의 왕비>라는 드라마에서 배우 박민영이 주연한 인물이 바로 단경왕후 신씨이다.


 단경왕후의 아버지 신수근은 당시 좌의정을 역임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수근은 자신의 매부인 연산군을 폐하고 사위인 진성대군(중종)을 왕으로 삼을 수 없었기에 반정에 가담하지 않았다. 반정에 성공한 세력들은 신수근을 역적으로 몰아 처형시키고 만다. 현직 왕비의 아버지를 처형시킨 반정세력들에게 단경왕후는 당연히 궁에서 쫓아내야만 하는 걸림돌이었다. 결국 정치적 힘이 너무 약했던 중종은 반정세력들의 강압에 이기지 못하고 자기 부인에 대한 폐위 결정을 승인하고 만다. 그리고 두 번째 부인으로 장경왕후 윤씨(1491~1515)를 맞이한다. 장경왕후 윤씨는 반정을 주도한 인물인 박원종과 친인척 관계의 인물이다.


 단경왕후 신씨는 남편과 헤어진 후 51년을 홀로 지내다가 71세에 돌아가셨다. 폐위된 지 233년이 지난 1739년(영조 15년)이 되어서야 왕비로 복위되었고, 능호도 온릉으로 승격되었다. 단경왕후는 중종이 자신을 몹시 그리워한다는 소식을 듣고 인왕산에 올라 붉은 치마를 걸쳐 놓았다고 한다. 중종에게 자신이 무사히 지내고 있음을 알리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인왕산 치마바위 전설의 시작이다.

 왕이 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던 중종은 자기 아내를 지켜줄 힘도 없었다. 반정세력에 이끌려 원비를 궁에서 내쫓았고, 반정을 주도했던 박원종과 친인척 관계에 있던 장경왕후 윤씨를 어쩔 수 없이 두 번째 아내로 맞이했다. 그런데, 장경왕후 윤씨가 왕비로 책봉된지 9년 만에 죽고 만다. 중종은 세 번째 부인으로 문정왕후 윤씨를 맞이하여 27년을 함께 산다. 그러나, 중종을 비롯한 세 명의 왕비 중 누구도 중종과 함께 잠든 사람이 없다. 원비인 단경왕후 신씨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에 있는 온릉, 제1계비 장경왕후 윤씨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희릉, 제2계비 문정왕후 윤씨는 서울 노원구 태릉, 그리고 중종은 서울 강남구 정릉에 잠들어 있다. 이렇게 뿔뿔이 흩어진 이산가족이 되어버린 데는 문정왕후 윤씨의 역할이 컸다. 신병주 교수님의 <왕비로 산다는 것>에 자세한 설명이 나온다고 한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꼭 읽어보려고 한다.



왕 곁에 잠들었지만 잠든 것 같지 않은 왕비들

고종(1852~1919)의 원비 명성황후 민씨(1851~1895)는 일본군에 의해 비참하게 죽은 조선의 국모(國母)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한편으로는 시아버지 흥선대원군과 맞선 당돌한 여인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한 여성과 왕비의 관점에서 보면 그녀는 대왕대비 신정왕후 조씨, 왕대비 효정왕후 홍씨, 대비 철인왕후 김씨가 살아 있을 때 16살의 나이로 고종과 결혼한 여인이다. 지금 생각하면 고종은 결혼 정보회사에서 가장 가장 낮은 점수를 받았을 결혼 기피 대상 신랑감 1위를 차지하고도 남을 것이다. 더군다나 고종은 후궁 귀인 이씨 사이에서 낳은 첫째 아들도 있는 상태였다. 최악의 결혼 조건에서 고종의 왕비로 간택된 명성황후는 결혼하고 5년이 지난 1871년(고종 8년)이 되어서야 왕자를 출생한다. 하지만, 태어난지 5일 만에 항문 폐색으로 왕자가 죽고 만다.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보낸 산삼을 임신 중에 너무 많이 먹은 것이 왕자의 죽음으로 이어진 거라고 명성황후는 끊임없이 의심했다고 한다. 다행히 1874년에 명성황후는 아들을 낳게 되는데, 바로 대한제국의 2대 황제이자 조선왕조의 제27대 왕이 된 순종(1874~1936)이다.  


 명성황후는 시신이 없는 상태에서 장례식은 치렀고 묘역(墓域) 조성이 진행되었다. 을미사변때 시체가 불태워졌기 때문이다.


  처음 명성황후의 무덤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에 조성된 숭릉(崇陵, 현종과 정비 명성왕후 김씨) 옆이었다. 그러나, 고종은 지금의 청량리로 정하고 능호를 홍릉(洪陵)이라 정했다. 지금 홍릉수목원 또는 홍릉숲이 있는 자리다. 그런데, 묘역으로 부적절하다는 논의가 지속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 금곡리 일대에 고종 황제가 묻힐 황제릉이 조성되고, 1919년 고종이 승하하자 홍릉에 있던 명성황후의 무덤을 옮겨 합장릉이 되었다. 이름은 기존의 홍릉을 그대로 유지했다. 청량리에 처음 조성되었던 묘역에는 이곳이 홍릉터였음을 알리는 표지석만 남아있다.               

홍릉숲에 있는 홍릉터 표지석

망국의 슬픔을 함께한 한 지붕 세 가족 : 순종, 순명황후 민씨, 순정황후 윤씨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를 지낸 순종(1874~1926)은 자신의 원비 순명황후 민씨(1872~1904)와 계비 순정황후 윤씨(1894~1966) 3명이 하나의 봉분에 같이 잠들어 계신다. 조선의 유일한 동봉삼실릉이다.


 순명황후는 시어머니 명성황후와 같은 여흥 민씨 집안이다. 1882년 11세가 되던 해에 순종과 혼인해 22년간 부부로 살았지만,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33살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지금의 어린이대공원 자리에 있던 유강원(裕康園)에 안장되었다. 1907년 남편이 황제로 등극하자 유강원은 유릉(裕陵)으로 승격된다. 어린이대공원의 행정구역명은 서울 광진구 능동이다. 능이 있는 동네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후 순종이 승하하자 순명황후는 경기도 남양주시에 조성된 유릉으로 옮겨져 남편과 함께 잠들게 된다.


 순명황후는 어린 나이에 나라를 빼앗기는 서러움을 겪었고, 시어머니가 일본군에 의해 시해되는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 것도 모자라 죽어서 잠들었던 유강원도 일본에 짓밟히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유강원을 남양주시에 있는 유릉으로 옮기고 나자 일본은 이곳을 골프장으로 만들었다. 당시 골프장 명칭은 ‘군자리 골프 코스’였다. 유강원을 지키던 석물들도 여기저기 흩어져버리고 말았다. 한국전쟁으로 골프장은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이승만 前 대통령은 한국에 골프장이 없어 미군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골프를 친다는 이야기를 듣고 1954년에 골프장 재건 공사를 지시한다. 이유는 달러 획득과 미군의 상주를 위해서였다고 전해진다.


 1972년 북한을 다녀온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평양에는 어린이를 공원이 잘 조성되어 있지만 우리는 없다고 보고한다. 공원 조성 공사가 시작되었고, 6개월 만에 골프장이었던 유강원터는 지금의 어린이대공원이 되었다. 기존 골프장은 경기도 고양시 원당으로 이전했는데, 지금의 서울·한양컨트리클럽(CC)이라고 한다.


  순종의 첫 번째 계비인 순정왕후 윤씨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이다. 1904년 순종의 원비 순명황후 민씨가 사망하자 1907년 12세의 나이로 황태자비에 책봉되고, 순종이 그해에 황제로 즉위하자 그녀도 황후가 되었다. 순종과는 20살 차이였다. 그러나, 3년 후인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됨으로써 대한제국의 국권은 피탈되었고, 일본은 대한제국의 황제를 이왕(李王)으로 격하시켰다. 이왕(李王)이란 일본에서 왕이라는 작위명(爵位名)을 받은 이씨 성을 가진 가문을 뜻한다. 대한제국 황실의 업무를 관장하던 궁내부(宮內府)라는 관청도 이왕직으로 격하되면서 일본 궁내성 소속으로 편입되었다. 쉽게 말해 대한민국 대통령실이 일본 내각실의 하위 조직이 되어 대통령과 관련된 모든 업무의 지휘감독을 일본에게 받게 된 셈이다.


  순정황후에 관한 유명한 일화는 한일합방이 이루어지던 1910년의 일이다. 병풍 뒤에 숨어 어전회의를 엿듣고 있던 황후는 한일합방이 결정되자 옥새를 치마 속에 감추고 내놓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숙부인 윤덕영에 의해 강제로 옥새를 빼앗기고 대한제국의 모든 국권이 일본에게 넘어가는 치욕을 당해야만 했다. 순정황후는 남편 순종이 이왕으로 강등되어 이왕비(李王妃)로 살다가 1966년 창덕궁 낙선재에서 73세로 사망했다. 순정황후는 끝까지 위엄과 기품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의 마지막 왕비 순정황후는 남편 순종과 순종의 원비 순명황후와 함께 유릉(裕陵)에 함께 잠들어 계신다. 시아버지 고종과 시어머니 명성황후가 있는 홍릉 옆에 있어 두 곳을 합쳐 홍유릉이라고 부른다.                                                                              

(좌)홍릉 / (우)유릉

 홍유릉은 조선왕조의 왕릉과는 다른 특징적인 모습이 있다. 황제와 황후가 묻힌 황릉의 성격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조선왕릉과 크기면에서 일단 엄청 차이가 난다. 일반적인 조선왕릉에 비해 홍릉과 유릉은 웅장함이 먼저 느껴진다. 가장 큰 차이는 석물의 위치다. 조선왕릉은 능침 주변에 석물이 있지만, 홍유릉은 침전으로 향하는 향로 좌우측으로 말, 낙타, 해치, 기린, 사자, 코끼리 문양의 석조물들이 늘어서 있다.    



■ 내 주변 여인들에게 감사하며 살자

 조선시대에 왕비가 되기 위한 가장 정상적인 과정을 생각해보면 그저 남편 잘 만난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남편이 세자로 책봉 되어야 하고, 본인은 세자 시절에 세자빈으로 간택이 되어야 한다. 세자로 책봉이 된다고 바로 왕이 되는 것도 아니다. 현재 왕이 돌아가셔야 세자가 다음 왕이 된다. 물론, 살아 있는 동안에 왕위를 물려주는 선위(禪位)라는 변수도 있다. 세자로 책봉된 남편을 만나 세자빈으로 간택되고, 세자가 왕으로 등극하여 왕비가 되는 정통 코스를 거친 조선의 왕비는 총 41명 중 고작 6명에 불과하다. 그만큼 왕위 계승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과 권력 난투극이 많았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신병주 교수님의 표현대로 조선시대 왕비는 그야말로 극한직업 중 하나였을 것이다.


 지금까지 소개드린 분들만큼의 서럽고 한 많은 인생사에 버금가는 다른 왕비들의 이야기가 책 속에 아주 잘 소개되고 있다. 물론, 모든 왕비가 다 억울한 사연만 있는 것은 아니다. 행복하고 편안한 왕비 생활을 했고, 남편과 함께 잠들어 계신 분들도 많다. 하지만, 여성에 대한 여러 가지 정치·사회적 배려가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 사실 얼마 되지 않았고, 지금도 여전히 제도적 보완뿐 아니라 인식의 개선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드니 왕 곁에 잠들지 못한 조선 왕비들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남자로서 부끄럽다고 느낀적도 많았다.


 또 한편으로는 우리 시대의 엄마, 이모, 고모, 누나, 아내, 그리고 딸들이 자랑스럽기도 했다. 시대의 불평등을 인내하며 헌신적 삶을 살아온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남성들의 숨이 붙어 있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위대한 어머니 만들었다.”라는 유대인 속담이 생각난다. 내 주변에 가까이 있는 여인들의 말을 잘 듣고 항상 감사하며 사는 현명한 남자가 되기로 했다. 마음만큼 실천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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