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다산을 다시 읽어야 할 시간
#1. 다산을 다시 읽다.
새 직장에서 맞는 첫 번째 휴가. 읽기와 쓰기로 가득 채우고 있다. 24년의 군 생활 동안 14번의 이사를 했다. 전역 후 드디어 군 관사가 아닌 내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얼마 전 이사를 하며 소파와 TV를 버렸다. 넓어진 빈 공간을 책장으로 채웠다. 번잡하게 진열되어 있던 책들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책, 『다산 정약용, 조선의 정의를 말하다』 우연일까? 대한민국에 정의가 바로 서야 할 시기에 정약용 선생님께서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자칭 세종파인데, 어찌 정조파의 대표주자인 다산의 책이 내 서재에 있었던가 싶어 펼쳐보니, 읽다 만 흔적이 남아 있었다. 책갈피가 꽂힌 페이지를 다시 펼쳐보며 문득, 다산이 말하는 조선의 정의를 통해 대한민국의 정의를 다시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동양의 형법사상에 대한 호기심도 함께 피어났다. 역시 독서는 언제나 옳다.
#2. 다산의 불행, 우리의 행운
다산 정약용 선생님은 정조, 수원화성, 거중기, 천주교, 18년간의 유배 생활과 500권 이상의 저술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 불릴 만큼 다양한 분야에서 시대를 앞서갔다. 정조와 함께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18년간의 유배 생활은 어땠을까?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이다. 만약 유배가 없었다면,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포』와 같은 걸작들은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마치 단테가 이탈리아에서 추방당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신곡』을 만나지 못했을 것처럼. 정약용 선생님께는 대단히 죄송스럽지만, 선생님께 유배는 불행이었겠으나 우리에게는 행운이었다.
전라남도 강진에 있는 다산초당을 다녀왔던 기억이 떠오른다. 돌아오는 길에 화순에 들러 정암 조광조 선생의 유배지도 방문했었다. 꽤 먼 여행길을 초등학생 두 딸과 함께했었다. 옳지 않은 선택이었다.
시대를 앞서간 조선의 위인들이 거쳐 갔던 유배지를 돌아보는 둘레길이 조성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소개된다면 아빠와 함께 떠나는 역사 여행을 아이들이 좋아하게 되지 않을까?
#3. 신중하고 또 신중하라, 『흠흠신서』가 남긴 시대의 충고
『정약용, 조선의 정의를 말하다』는 『흠흠신서』를 통해 조선의 정의를 조명하며, 오늘의 대한민국을 되돌아보게 한다. 정약용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뛰어난 실학자이자 수사관이었다. 조선시대에도 지금의 과학수사 못지않은 철저한 조사와 과학적 검증이 있었다. 억울함이 없고 정의로운 판결을 위해서였다.
『흠흠신서』의 첫 장, ‘목민관의 임무와 자세’는 오늘날 관료화된 공직자들이 반드시 새겨야 할 내용이다. 목민관(牧民官)은 백성을 다스리는 벼슬이라는 뜻으로, 오늘날 공무원을 말한다. 목민관의 올바른 자세에 대한 다산의 가르침은 시대가 변해도 가슴을 울린다.
“권세 있는 자들 때문에 고통과 억울함을 감히 말하지 못하는 백성들은 말 못 하는 어린아이와 같다. 백성들의 호소를 부모가 자식 대하는 마음으로 들어 주어야 한다.”
마치 세종대왕님의 애민 DNA가 정약용 선생님에게 유전된 듯한 짜릿함이 느껴진다.
조선 후기의 정치적 혼란과 도탄에 빠진 백성의 삶, 다산에게는 해결해야 할 시대적 소명이었다. 다산이 생각한 해결책은 정의로운 사회 구현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목민관들이 올바른 마음으로 부여된 도덕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게 다산의 생각이었다.
『흠흠신서』는 중국 원나라의 『무원록』이라는 법의학서와 명나라의 『대명률』이라는 법전에 근거하고 있다. 『무원록』은 없을 무(無), 원통할 원(寃)자에서 알 수 있듯, 억울함이 없도록 판결하기 위해 집대성한 법의학서다. 『무원록』의 내용이 조선의 현실과 달라 세종의 지시로 좌승지 최치운(1330~1440)이 정비하여 1440년 세종 22년에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을 간행했다. 역시 세종대왕이다. 이후 『신주무원록』은 영조와 정조 때 두 차례 더 개정되었다.
『흠흠신서(欽欽新書)』는 다산 정약용이 법을 집행하고 사건을 수사하는 공무원들을 위해 집필한 한국 법제사상 최초의 법률학 연구서이다. '흠(欽)'은 조심하고 신중해야 한다는 뜻이다. 두 번씩이나 강조한 계기는 1807년 전남 강진에서 발생한 정씨 부인 자살 사건이다.
다산은 유배 생활 중 정씨 부인 자살 사건에 대한 검안보고서 작성을 부탁받는다. 정씨 부인은 남편을 일찍 저세상으로 보내고 혼자 아이를 키우던 여인이었다. 노총각 김상운이라는 사람이 정씨 부인을 아내로 취하고자 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한다. 김상운은 끝내 그녀를 강간하려 했다. 치욕스러움을 견디지 못한 정씨 부인은 결국 자살했다. 정약용은 정씨 부인을 강간하려 했던 김상운은 정씨 부인을 살해하려는 의도가 없었기 때문에 정상참작 하여 사형에 처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훗날 다산은 자신의 검안보고서를 다시 살펴보며 신중함의 부족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그래서 신중하고 또 신중하게 판결해야 한다는 뜻에서 조심할 ‘흠’ 자를 썼다. 세종대왕도 형을 집행할 때 『서경』에 나온 말을 인용했다. ‘서경에 조심하고 또 조심하라. 형을 시행함에 조심하라는 말은 내 항상 잊지 못하는 바이다.’ 두 성현의 정신은 지금도 유효하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다산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와 의정부지검 남양주지청에 『흠흠신서』의 서문이 걸려있다고 한다. 그릇된 일을 바로잡기 위해 조사하여 결정하는 기관을 사정(司正)기관이라 부른다. 대한민국의 모든 사정기관에 『흠흠신서』 서문이 걸리는 날을 희망해 본다. 단순한 장식용이 아니라, 그 정신이 깊이 새겨지길 바란다.
#4. 근대 형법의 3대 원칙과 <흠흠신서>
근대 형법의 3대 원칙은 무죄추정의 원칙, 죄형법정주의, 증거재판주의다. 놀랍게도 『흠흠신서』에서도 이 원칙들이 발견된다. 다산은 죄가 의심스럽거나 조사가 미진하면 가볍게 판결해야 한다는 죄의유경(罪疑惟輕), 반드시 ‘대명률’ 등 법전에 근거해 판결해야 한다는 원칙, 검안이나 검시 등 현장 조사를 통해 수집한 충분한 증거에 근거한 판결을 강조한다.
베카리아는 “범죄에 대한 형벌은 오직 법률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라며, 1764년 『범죄와 형벌』을 통해 근대 유럽 형법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했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이 1762년에 출간되었으니 아마도 베카리아는 루소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범죄의 형벌』은 출간 당시 유럽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볼테르를 비롯한 많은 계몽주의 사상가의 극찬을 받았다. 교황청은 이 책을 금서로 지정했다. 1990년대가 되어서야 한글로 번역되었고 현재는 <범죄와 형법』이 품절이라는 소식은 조금 안타깝다.
『범죄와 형벌>이 근대 유럽 형벌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했다면, 『흠흠신서』는 동양적 맥락에서 정의와 법의 본질을 깊이 고민한 다산의 결정체이다. 『흠흠신서』는 『범죄의 형벌』보다 약 120년이 지난 1882년에 편찬되었다. 두 저작이 120여 년의 시차를 가지고 있지만, 억울한 이가 없도록 해야 한다는 다산의 가르침은 베카리아의 사상과 맞닿아 있다. 법의 집행은 단순한 규정의 적용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과 공동체의 정의를 실현하는 일이다.
#5. 다산이 부정한 우민론, 우리가 증명한 대중의 힘
다산은 의롭지 않은 헛된 죽음을 강하게 비판했다. 사사로운 원한으로 인한 충동적 죽음과 불의에 대한 저항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대학』에는 명명덕(明明德, 밝은 덕을 밝힌다)와 신민(新民, 백성을 새롭게 한다)는 가르침이 있다. 정의로운 사회는 개인의 도덕적 각성과 타인의 도덕성을 함께 세우는 도덕 공동체여야 한다.
다산은 도덕적 본성이 선천적이라기보단, 실천과 노력의 결과라 보았다. 사람은 선한 데로 나아가려는 성향을 깨달아 부도덕한 행위를 부끄럽게 여기고, 선으로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보았다. 즉, 인간 스스로 도덕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단, 끊임없는 실천과 노력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래서 다산은 평민을 어리석게만 여기고 차별하는 우민론(愚民論, 백성은 본래 어리석고 무지하니 지배자는 그들을 계몽하거나 이끌어야 한다는 엘리트주의적 통치관)에 빠지지 않았다.
현대 사회에는 마키아벨리처럼 ‘대중은 어리석다. 어리석은 무리를 다스리는 길은 권모술수밖에 없다’라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우매한 군중이 아니라 영리한 대중이 모여 권력을 심판한 경험을 가진 나라이기 때문이다.
#6. 지금, 다시 다산을 읽어야 하는 이유
나는 이제 더 이상 목민관이 아니지만, 공직자로서의 태도만큼은 여전히 내 삶의 중심에 두려 한다. 공직의 본질적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며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만들려는 이들이 많다. 그들의 헌신 덕분에 오늘도 편안히 읽고 쓰고 사유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
하지만, 이 시대의 지도자들은 더 깊이 각성해야 한다. 책상 위에 쌓이는 보고서에 의존하지 말고, 약자의 억울함과 소외된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정의를 향한 성찰의 눈을 다시 뜨길 바란다. 다산 선생님께서 평생 그러했듯이.
그래서 우리는 지금 다산을 다시 읽어야 한다. 반복해서라도 다산을 다시 읽어야 한다. 우리가 대한민국의 정의를 다시 세우고 바로잡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바로 지금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