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밸리 군주론

사랑받는 군주는 왜 위험한가?

by 미래몽상가

<군주론> 번역서가 여러 권 있지만, 신동준(1956~2019) 교수의 번역본이 이탈리어 원문에 가장 가깝고 영문판을 번역하며 생긴 오류들을 수정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고 한다.

프린켑스, 제1의 시민

카이사르는 영원한 제왕이 되려다 죽임을 당했다. 그 뒤를 이은 옥타비아누스는 달랐다. 그는 '아우구스투스(존엄한 자)'라는 화려한 칭호 대신 '프린켑스(princeps)', 즉 제1의 시민으로 불리길 원했다. 군주론의 원제 '프린치페(principe)'는 바로 여기서 왔다.


제왕이 아니라 시민. 그러나 가장 앞에 서는 시민. 이 미묘한 차이 속에 권력의 본질이 숨어 있다. 군림하되 군림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것. 마키아벨리는 500년 전 피렌체에서 이 역설을 꿰뚫어 보았다.




비르투, 포르투나, 네체시타

《군주론》을 관통하는 세 개의 키워드가 있다. 비르투(virtù), 포르투나(fortuna), 네체시타(necessità)이다.


비르투(virtù)는 군주가 갖춰야 할 역량이다. 단순한 덕목이 아니다. 상황을 읽고, 결단하고, 실행하는 힘. 때로는 도덕을 넘어서는 과감함까지 포함한다. 마키아벨리에게 비르투는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효과의 문제였다.


포르투나(fortuna)는 운명, 혹은 시대의 흐름이다.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다. 마키아밸리는 이러한 운명의 힘은 대항할 비르투가 조직되어 있지 않은 곳에서 그 위력을 과시한다고 말한다. 마키아벨리는 이를 범람하는 강에 비유했다. 강물을 막을 수는 없지만, 제방을 쌓아 피해를 줄일 수는 있다. 제방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 곳으로 포르투나는 물길을 돌린다고 보았다. 당시 피렌체야말로 아무런 제방을 쌓아 두지 않은 약한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군주론에서 주장했다. 비르투가 강한 군주는 포르투나에 휩쓸리지 않는다.


네체시타(necessità)는 필연, 또는 불가피한 상황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 군주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마키아벨리는 이상이 아니라 현실에서 답을 찾았다.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하라. 그리고 군주는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고, 국가를 지키기는 데 도움이 된다면 선하지 않은 행동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 개념은 서로 얽혀 있다. 포르투나가 닥쳤을 때, 네체시타를 인식하고, 비르투로 돌파하는 것. 이것이 마키아벨리가 그린 군주의 모습이었다. 즉, 군주는 포르투나(운명)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비르투(역량)을 발휘하여 네체시타(불가피한 상황)에 적응해야 한다.


사랑보다 두려움

《군주론》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이 있다. “군주는 사랑받는 동시에 두려운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편이 훨씬 낫다.” 이다.


왜 그런가? 마키아벨리의 대답은 직설적이다. 물질적 대가를 통해 형성된 우호 관계는 진정한 소유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인간은 두려운 자보다 사랑을 베푸는 자를 해칠 때 덜 주저한다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주장이다.

절박한 순간, 인간의 본성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나는 이 구절에서 한참을 멈췄다. 불편했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이토록 냉정한 시선이 과연 옳은가? 동시에, 왜 이렇게 익숙하게 느껴지는가?


이것이 바로 네체시타의 순간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 군주는 사랑이 아닌 두려움을 택해야 한다. 비르투를 갖춘 군주만이 이 냉혹한 현실을 직시할 수 있다.


증오만은 피하라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한 가지를 거듭 강조한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더라도, 증오는 절대로 사서는 안 된다. 그가 든 사례가 흥미롭다.


볼로냐의 벤티볼리오 가문은 백성들에게 두터운 신망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칸네스키 가문의 반역으로 군주가 시해당하고, 밴티볼리오 가문도 풍비박산이 난다. 그러자 격분한 백성들이 반역자 일당인 칸네스키 가문을 몰살시켜버렸다.


당시 밴티볼리오 가문을 승계할 유일한 혈육은 겨우 두 살배기 조반니뿐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밴티볼리오 가문이 숙청될 때 살아남은 가문 사람이 피렌체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러자 백성들은 피렌체에서 먼 친척을 데려와 조반니가 성년이 될 때까지 국정을 맡겼다. 그가 바로 산테 벤티볼리오(1426~1463)이다. 실제로 그는 조반니가 성인이 될 때까지만 국정을 운영했다.


두려움은 복종을 낳지만, 증오는 파멸을 부른다. 사랑은 배신당할 수 있지만, 신망은 왕조를 지킨다.


마키아벨리는 또한 프랑스 파리 고등법원의 사례에서 교훈을 끌어낸다. 군주는 증오를 촉발할 일은 남에게 맡기고, 칭송받을 일은 자신이 도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포르투나가 가져다주는 좋은 일은 자신의 비르투로 포장하고, 네체시타로 인한 악역은 신하에게 맡기는 것. 이것이 권력의 기술이다.



숨겨진 가정을 의심하다

여기서 나는 질문을 하나 품게 되었다. 마키아벨리의 논리가 참이 되려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이고 물질주의적이라는 전제가 필요하다. 다윈의 진화론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환경에 적응하고 살아남는 자가 선택받는다. 생존이 최우선이다.


그런데 이것이 유일한 가정일까? 미래학은 사회변동을 예측할 때 다양한 이론을 활용한다. 그리고 각 이론에는 저마다의 전제가 숨어있다. 기술결정론은 인간이 물질주의적이라고 가정한다. 그러나 인간이 도덕적 가치와 윤리적 이상을 추구하는 존재라면? 그 가정이 달라지면, 결론도 달라진다.


마키아벨리는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의 혼란 속에서 글을 썼다. 메디치 가문의 부침, 끊임없는 전쟁과 배신. 그가 본 인간은 그런 인간이었다. 공직자로서 직접 겪은 처절한 경험이 그의 사상을 빚었다. 사상은 시대의 산물이다.


하지만 그의 시대가 모든 시대는 아니다. 그가 본 인간이 모든 인간은 아니다.


나의 가정은 무엇인가?

책을 덮으며 생각했다. 나는 어떤 가정 위에 서 있는가. 인간은 이기적이라고 믿는가, 아니면 선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가. 두려움이 사람을 움직인다고 보는가, 신뢰가 사람을 움직인다고 보는가.


《군주론》은 권력의 기술을 가르치는 책이 아니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이 책은 내가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그 시선의 뿌리를 들여다보게 만드는 거울이었다.


신동준 교수의 번역은 이탈리아어 원문에 가장 가깝다고 평가받는다. 영문판을 거치며 생긴 오류들을 바로잡았다고 한다. 500년 전 마키아벨리의 목소리를 가장 선명하게 듣고 싶다면, 이 번역본이 좋은 선택일 것이다.




비르투로 포르투나에 맞서고, 네체시타 앞에서 결단하라.

마키아벨리의 조언은 명쾌하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묻는다. 나의 비르투는 무엇을 향해 있는가? 내가 맞서야 할 포르투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정말로 피할 수 없는 네체시타란 존재하는가? 500년 전 질문이 오늘 나에게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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