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그냥 좋아서
나는 ‘그냥‘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대기업 8년 차 영써티 직장인이다.
한국 사회에서 이만하면 앓는 소리 내지 않고 살 수 있을 텐데, 나는 왜 우울감을 느끼는 걸까.
심지어,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으면 받았지 못한다는 소리는 못 들었다.(아 요즘은 이상한 논리에 갇혀있는 사람하고 엮여서 능력 부족이라고 듣긴 한다.)
또 사람들하고도 잘 지냈다. 소위 NICE한 동료이다.
앞선 화에서 이야기했듯, 나는 주체적으로 살고 있다고 착각했다.
스스로에 대한 콩깍지가 벗겨지고 나니 그건 내게 주어진 틀 안에서, 내게 주어진 선택지 안에서 나름의 선택을 한 것뿐이었다.
왜 나의 틀이 좁다는 걸 몰랐을까.
어릴 때부터 나는 비교와 함께 컸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비슷하겠지.
모든 세대가 그렇듯 부모님의 최대 화젯거리는 자식 자랑이고, 남의 자식 자랑을 듣고 오면 내 자식에게 부러움을 잔뜩 끼얹어 이야기하고.
학교에서도 친구들끼리와 비교에서 벗어날 수 없다.
누구는 전교, 전국 몇 등이더라로 시작해 누구는 어디에 취직했다더라, 어떤 사람과 결혼했다더라..
형제끼리도 비교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옆집 숟가락 개수까지 안다는 표현은 관심을 넘어 옆집과 끊임없이 비교하며 살아온 작디 작은 나라의 전통을 이야기 하는 것 같다
그렇게 올라탄 비교의 굴레는 내 좁은 틀이 되었고, 보기가 몇 개 없는 선택지가 되었다.
한 번도 그 선택들 안에서 ‘그냥 좋아서’라는 이유는 없었다.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 내린 선택은 없었다.
마음으로 달려본 적은커녕 걸어본 적 조차 없다.
물론 질투는 투지력을 올리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다져진 반석 없이 끊임없는 비교로 쌓아 올려진 인생이 단단할까?
나는 20대 때부터 이 부실 공사를 인지하고 있던 것 같다. 그래서 남들과 비교가 더 심해졌던 것 같다. 누가 봐도 흠결 없는 외관의 성을 쌓기 위해서 말이다.
그래도 운 좋게 주변에 주체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은 덕분에 비교를 멈춰야겠다고 생각했고 소셜미디어를 다 지웠다.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나 조차도 자랑거리만 포스팅하면서, 남들의 자랑거리를 보며 불안에 잠기는 날들이 줄게 되었다.
30년 넘게 비교와 함께 살아왔기에 완전히 비교에서 벗어나긴 힘들지만 나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들이 늘었다.
그러나 아직 깊은 탐구와 사유는 부족하다. 마음의 근육은 아직도 턱없이 부족하고 아직 관성으로 남아있는 비교가 자주 발목을 잡는다.
몇 달 전에는 의약대 진학을 결심했다. 이 AI 혁명시대에 전문기술이 필요할 것 같았다.
또, 대기업 직장인이라는 타이틀이 나를 평생 경제적 어려움에서 보호해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에 전문직으로 변경해야겠다 생각했다.
오랜 연인은 너의 오랜 꿈도 아니잖아라며 반대했었다.
여행에서 행복하냐는 심장에 꽂힌 질문에 오랜 연인의 말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행복하지 않고, 불안한 삶 때문에 커리어 변경을 고민하면서도 또 비교의 방식으로 고민하고 내린 결심이었던 거다.
나에게 주체적으로 산다는 건 무엇일까.
‘그냥은 없다’를 입에 달고 살아서 비교의 굴레에 들어서버린 건지, 비교로 자라서 ‘그냥은 없다’가 입에 배인 건지,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나는 ‘그냥 좋아서’를 찾고 있다는 거다.
그건 어떤 커리어를 말하는 게 아니다.
나의 꿈이 꼭 직업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직업은 ‘그냥 좋아서’를 마음 편히 할 수 있게 해주는 생계 수단이어도 된다. 그저 ‘그냥 좋아서’를 뭐든 찾고 싶은 거다.
여태까지 나에 대한 이야기를 서술했지만
사실 한국인들, 특히 내 또래 한국인들 대부분이 나와 비슷할 것이다.
좋은 교육과 헌신, 그리고 좋은 시기에 태어나 선택의 자유가 넓어졌지만 느껴보지 못한, 머리와 마음의 부조화를 지닌 세대. 마음으로 뛰어본 적 없는 세대.
다들 자신의 그냥을 찾으면 좋겠다.
………………
이 아래는 그냥 일기다.
지난 주는 정말 힘들었다.
현장에서 욕먹어가면서도, 임원들에게도 굽혀본 적 없는 내 신념이 꺾였다.
윽박지름과 욕지거리를 듣는 건 금방 털어낼 수 있다.
학계에서 절대 하지 말라는 논리를, 본인만의 노하우라며 나에게 강요하는, 내 경험 부족이라며 이해 못 하겠으면 ‘그냥 ‘ 받아들이라는,
시키는 대로 하겠다 했지만 본인이 맞다는 말을 듣기 전까지 나를 놓아주지 않은 이상한 사람에게 걸렸다.
그 굴욕감이란, 인조가 머리를 아홉 번 찧을 때 이런 심정이었을까? 삼전도의 굴욕에 비교할 건 아니지만 내 마지막 남은 자부심이 괴롭힘에 벗어나기 위해 납득되지 않음에도 듣고 싶은 말을 해주고 풀려나는 순간 무너져 내렸다.
나는 이게 아닌 걸 아는데, 맞다는 전제로 개발팀에 건네는 자료를 만드는 나의 모습에 심장이 울컥울컥 하고 그때마다 눈물이 맺혔다.(울지는 않았다.)
결국 그 자료를 개발팀에 건네는 날, 개발팀은 내가 의문을 품은 내용에 대해 똑같이 질문했고, 내가 부족해서 이해 못 하는 거라고 윽박지르던 그는 제대로 된 대답을 못하고 나를 쳐다봤다.
그런 사람에게 마지막 남은 자부심이 꺾였다는 거에 또 하루가 너무 힘들었다.
아무리 내가 ‘그냥’을 찾고 있다고 해도 아닌 걸 알면서 받아들이는 ‘그냥’은 내가 찾는 게 아니다.
계속 뾰족하게 찌르는 감정들을 친구들이 뭉툭하게 다듬어줬다. 오랜 연인은 무너지는 나를 감싸 안고 일으켜줬다. 그럼에도 아직 여전히 아프고 계속 주저앉고 있다.
그러나 이번엔 내 힘도 보태어 일어날 기미가 보인다.
주도적 인생 살기를 하겠다고 시작한 운동과 피아노가 계속 떠오르는 모욕감과 양심이 무너져 내려 생긴 돌덩이들을 머릿속에서 순간이라도 지워지게 해주고 있다.
아직도 왈칵왈칵 쏟아지는 분노와 굴욕감과 나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 눈물 맺히게 만들지만 이 또한 잘 다스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