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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백 Aug 09. 2023

남편 님께 보내는 무뚝뚝한 연서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담아

올해 여름휴가는 군산의 신시도를 방문했다. 2박 3일의 짧은 휴가, 휴양림 피케팅에 성공해서 군산으로 출발! 이번 여행의 컨셉은 철저하게 무계획이었다. 아이들과 떠나는 여행에는 하루에 한 개 이상의 일정을 잡지 않지만 이번에는 그마저도 계획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가족 중에 유일하게 혼자만의 계획을 세우고 여행 내내 끊임없이 타령을 부르는 자가 있었으니. 우리 첫째 대단이였다.


연일 폭염경보로 핸드폰에서는 사이렌이 울려대는 살인적인 날씨, 대단이의 군산여행 계획은 오로지 갯벌 체험에 맞춰져 있었다. 군산으로 휴가지가 정해지자 남편 님은 아이들에게 갯벌에서 각종 해산물을 채취하는 영상을 아이들에게 보여 주었다. 그 영상은 미래의 백만 유튜버 대단이의 가슴을 웅장하게 한 모양이다. 이후로 자기는 계속 갯벌 체험을 할 것이라고 노래를 불러댔다. 처음에는 웃으면서 그래, 갯벌 체험을 가자 했다. 그런데 여행을 가기로 한 날이 가까워질수록 우리 부부는 매우 불안해졌다. 전무후무한 폭염이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남편 님은 특히나 햇빛에 민감다. 여름 한낮에는 잠깐이라도 바깥을 걷는 것을 힘겨워한다. 남편 님과 꽁냥꽁냥 연애하던 시절 여름, 데이트를 위해 낮에 만날 때면 저 멀리서 잔뜩 인상을 쓰며 다가오는 남편 님이 의아했다. 여름에는 바깥외출을 기피하는 사람인데 사랑의 힘으로(?) 꾸역꾸역 나온 것임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런 남편이 이상 기후로 지구가 뜨거운 입김을 내뿜고 있는 이때 땡볕에서 갯벌 체험을 한다니 상상이 되지 않았다. 설마......... 나보고 하라는 것은 아니겠지? 부러 걱정이 되어 대단이에게 갯벌 바람을 넣은 것은 남편 님이었음을 강조하며 선을 그었다.


대단이는 무척 집요한 성격이다. 대단이의 갯벌 타령은 한시도 쉬지 않았다. 나는 이 뜨거운 날씨에 갯벌체험을 하는 곳은 군산에서 한 군데도 없으리라 확신했다. 하지만 갯벌체험을 하지 않으면 대단이의 투정으로 인해 남은 여행이 엉망진창이 될 것이 분명했다.


남편은 가까스로 갯벌체험을 하는 곳을 섭외했다. 그리고 나에게 웃으면서 같이 가자고 했다. 좀처럼 그런 말을 하지 않는 남편인데 이 날씨에 갯벌체험은 용기가 필요한 영역이었나 보다. 미안하지만 나는 갯벌체험을 할 생각이 1%도 없었다. 뽀뽀의 핑계를 대고 나는 갯벌체험장 입구에서 줄행랑을 놓았다.


평상시에는 싫어하는지 모르고 살다가 막상 맞닥뜨리면 '아, 내가 이걸 무지하게 싫어하는구나.'하고 상기하게 되는 것이 있다. 나에게는 그것이 '바닷물'이더라. 물만 보면 환장하는 뽀뽀와 해수욕장에 간 나는 매우 번거로운 상황을 마주했다. 바닷물 속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발목만 들어갈 요량이었는데 뽀뽀는 더 깊은 곳으로 나를 끌어 갔다. 바지는 속절없이 젖어가고 설상가상 뽀뽀가 물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끈적끈적 따끔따끔한 바닷물의 질감과 찝찔한 맛이 불쾌했다. 뽀뽀는 점점 신이 나고 나는 기분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여행에 동행해 주신 친정 엄마가 나의 구세주였다. 뽀뽀를 엄마에게 맡기고 바닷물에서 해방된 나는 해변의 한여름 햇빛을 막아주는 파라솔 밑에서 호미를 들고 부지런히 조개를 캐고 있을 남편 님을 생각했다.


남편 님은 자기표현에 서투른 사람이다. 남편 님이 남친이던 시절, 좋고 싫음을 드러내지 않고 그저 가만히 받아들여 주는 남편 님이 참 좋았다. 그토록 좋았던 남편 님의 성향은 결혼생활을 하면서 다툼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아이를 키우며 힘에 부쳤던 나날, 서로에게 응원과 격려 대신 말로 창과 방패를 휘둘렀다. 원래 평온한 사람이라 비난의 칼을 휘두르면 유독 힘들어하고 더욱 말을 아꼈다. 그런 남편 님의 묵묵한 성정이 나를 더욱 답답하게 했다.


나와 닮은 아이에게 남편 님의 장점은 또 빛을 발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거침없이 표현하고 관철시키는 대단이. 남편 님은 본인이 할 수 있는 한에서 대단이의 요구를 수용하고 함께 했다. 그런데 한여름 갯벌 체험까지 불사하는 것을 보니 남편 님의 '본인이 할 수 있는'은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삼킬 것처럼 휘몰아치는 폭풍 속 바다가 나의 마음이라면 지금 눈앞에 펼쳐진 저 잔잔한 바다가 남편 님의 마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편 님과 대단이는 한 여름 제일 뜨거운 시각 두 시간의 갯벌 체험을 마지고 바지락을 가득 넣은 망 두 개를 들고 귀환했다. 남편 님은 갯벌 위에서 단 한순간도 아이에게 짜증을 내지 않았다. 벌겋게 익어 가면서도 아이의 컨디션을 걱정하고 조개를 찾는 아이의 열정을 칭찬했다. 십수 년 전, 인파로 북적이는 도심의 땡볕 아래에서 연인을 기다리는 마음과 같은 온도로 우리의 아이를 사랑하는 남편 님, 사랑하고 존경하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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