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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의 온도에 대하여 '러브레터'

'러브레터'와 다시 사랑에 빠져 버릴 것 같아.

by 영백

회사 동료들과 공짜배구 관람을 가려다 노선을 급변경했다. 눈이 며칠째 펑펑 내린 탓이다, 창문을 통해 보이는 풍경은 그림 같았다. 스노우볼 안에서 흩날리는 눈가루처럼 소복소복 내리는 눈을 보니 예쁜 것에 다소 박한 나조차도 마음이 몽실몽실 차 올랐다. 따뜻한 카페에서 나올 법한 BGM을 켜고 싶은 마음도 잠시, 회사 앞 출입로와 주차장에 쌓인 눈을 치우기 위해 동원되어 팔자에도 없는 눈 치우기를 하게 된 순간 머릿속에선 레미제라블의 노동요가 울려 퍼졌다.


여하튼 이 날씨를 뚫고 갈 정도로 배구에 대한 열정은 없어서 우리는 '러브레터'를 보러 가기로 했다. 러브레터가 재개봉한 것도 몰랐었다. 눈 내리는 날에 설경이 아름다운 영화를 보러 간다니, 묘하게 설레었다. 한바탕 눈이 지나고 간 퇴근 시각, 도시의 도로 상황은 낭만보다는 전쟁에 가까웠지만.


1999년 '러브레터'가 개봉하자, 토요일 수업을 마치고 교복을 입은 채로 극장에 가서 영화를 봤다. 1995년작인 이 영화가 늦깎이 개봉을 한 이유는 김대중 정권이 되어서야 일본 문화가 개방됐기 때문이다. 그 이전까지는 일본 영화나 노래는 국내에 정식으로 소개되지 못했다. 그런 열악한 환경을 뚫고 이미 볼만한 사람은 다 사제(?) 비디오테이프로 돌려 봤다는 전설의 명작이 있었으니- 바로 이 영화 '러브레터'다. 학교, 집을 오가는 고1 여자아이에게 이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은 그 해의 이벤트라고 할 만한 일이었다. 교실 안에서 토요일이 오기를 기다리며 보낸 월화수목금의 기분은 설렘지수 120%! 무채색의 나날들 속에 새하얗게 채색된 하루가 있다면, 바로 이 날이었을 것이다.



3년 전, 연인을 사고로 잃은 와타나베 히로코는 상실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우연히 연인 후지이 이츠키의 중학교 졸업앨범을 보고 알게 된 후지이의 중학시절 주소로 히로코는 편지를 보낸다. 분명히 집은 없어져 그 자리는 도로가 되었다고 했는데 놀랍게도 답장이 왔다. 그것도 연인 '후지이 이츠키'로부터!


후지이 이츠키는 다소 엉뚱하지만 귀엽고 씩씩한 아가씨다. 어릴 적 아버지를 잃은 트라우마로 병원에 가기 싫어 감기로 골골대는 와중에 낯선 사람으로부터 편지를 받는다. 중학교 동창과 자신을 오인한 해프닝이란 것이 밝혀지지만 와타나베 히로코의 요청으로 편지 왕래를 이어간다. 참 이상했던 그 녀석 후지이 이츠키에 대한 기억을 하나둘씩 꺼내면서.


영화의 잔상은 꽤 강렬해서, 후지이 이츠키가 눈물을 참아내며 웃는 마지막 장면이 참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러브레터의 명장면으로 회자되는 '오겡~끼데스까아아아~'보다도 '러브레터'하면 나에게는 이 장면이었다. 중학교 후배들이 후지이 이츠키(남)의 도서카드를 발견하고, 후지이 이츠키(여)에게 전해주는 장면. 후지이 이츠키(남)가 마지막으로 후지이 이츠키(여)에게 전하고 싶었던 말은 '좋아해'라는 고백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는 장면이다. 후지이 이츠키의 마지막 대사는 '가슴이 아파서 마지막 편지는 보내지 못하겠습니다'로 번역되었는데 정확한 번역은 '쑥스러워서 마지막 편지는 보내지 못하겠습니다.'라고. 이번 재개봉에는 오역을 바로잡았다.

'가슴이 아파서'라는 말이 눈물을 삼키고 미소 짓는 후지이 이츠키의 얼굴과 맞물려 마음을 쿵하고 울렸기에 기존의 오역본을 선호하는 팬도 많았다. 그런데 곱씹어보니 '쑥스러워서' 마지막 편지를 보내지 못하겠다는 대사가 자신의 진짜 마음을 쉽게 꺼내지 못하는 후지이 이츠키의 성격에 더 적절한 정서라고 느껴지긴 했다.


내 기억에 '러브레터'는 두 후지이 이츠키가 알콩달콩 나누는 첫사랑의 감정이 아름다웠던 영화였는데 다시 보니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였다.


한 사람을 향한 마음이 참 엇갈리기도 했다. 후지이 이츠키(남)는 둔해 빠진 여자애를 좋아한 탓에 결론 내지 못한 첫사랑에 대한 아쉬움을 안고 살다 첫사랑과 꼭 닮은 와타나베 히로코를 만나 첫눈에 반하고, 와타나베 히로코는 연인 후지이 이츠키를 잊지 못해 아파하다 연인의 첫사랑인 후지이 이츠키에게까지 닿게 된다. 후지이 이츠키(여)는 과거를 회상하다 미처 몰랐던 그때의 마음을 깨닫게 된다. '나도 사실 그 애를 좋아했어.'


히로코는 이츠키를 보고 죽은 연인의 진심이 자신을 향했던 것인지 혼란스러워한다. 이츠키는 히로코와 소통하며 한번도 꺼내보지 못했던 자신의 진심을 확인한다.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람의 진심 따윈 확인할 수 없지만 살아있는 두 사람의 그리움이 '진짜'인 것을 누가 의심할 수 있을까?


아픔이 현재 진행형인 히로코의 절절하게 끓어올랐던 마음은 연인의 사춘기를 관통하며 잔잔해지고, 내내 잊고 지냈던 녀석과의 추억을 피식피식 웃으며 되짚어 보던 후지이 이츠키는 차오르는 눈물을 참지 못한다. 두 사람의 그리움의 온도는 그 정도에서 맞춰지지 않았을까.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게. 손가락을 살포시 찔러보기도, 한 숟갈 퍼 먹기도 좋게 딱 그 정도로.


나에게도 '그리움'으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 시간, 장소가 있을까. 항상 오늘을 살아내기 바빠, 지나간 것들에 대한 애틋함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런 말은 하지 말 걸.' '좀 더 친절하게 대해줄걸.''거리를 두고 좀 지켜볼걸.' 껄껄껄... 웬 껄무새? 지나간 일에 대한 후회만 잔뜩 떠오르지 그리워할만한 대상은 쉬 떠오르지 않는다.


문득 돌아가고 싶은 곳이 있다는 것은, 설령 그곳이 지금은 존재하지 않다고 해도, 행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찾아가서 '그 책 나왔어요?'하고 물어봤던 퀴퀴한 냄새 가득한 만화책방, 학교 도서관 3층 서가 창가 앞에 놓인 비밀의 책상, 두 손을 꼭 잡고 거닐었던 안국동의 낙엽길.


몇 개의 기억들 너머, 1999년 초겨울 러브레터를 본 날이 그리워졌다. 영화를 보고 나서 한없이 설레는 기분을 정의 내리지 못한 채, 집에 돌아가기 아쉬운 마음을 어쩌지 못했던 17살의 하루가.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게. 그냥 그 정도로 그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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