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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이 꽁꽁 숨겨 놓은 이야기 <파벨만스>

아픔도 어느 순간, 내 삶의 일부가 되어 있다.

by 영백

스티븐 스필버그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영화로 담아낸 <파벨만스>를 보고 있는데 첫째 대단이가 옆으로 와서 묻는다. "엄마, 뭐 봐?"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인 스필버그의 이야기라니까 대단이는 "나 그 사람 알아!" 하면서 책장에서 위인전 전집 중 한 권을 가져왔다.


'아이처럼 상상하는 스필버그' 겁쟁이 어린이였던 스필버그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영화 <죠스>를 만들고 밤하늘을 보며 펼치던 상상의 나래는 <ET>로 이어졌다. 공룡을 좋아했던 순수한 마음은 <쥬라기 공원>을 탄생시켰다는 아주 교훈적인 이야기였다.


시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라는 말은 아이가 이해하기 쉽게 단순하게 표현한 것이지만 과장은 아니다. <파벨만스>의 주인공 새미가 6살 때 엄마아빠와 함께 간 극장에서 <지상 최대의 쇼>라는 영화를 보고 영혼을 빼앗겼듯, 나는 작은 브라운관 TV로 설날특선명작 <인다아나 존스 : 저주받은 사원>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세상에, 이렇게 재미있을 수가 있나? 물론 그 이전에도 비디오로 혹은 간간히 극장에서 본 영화들도 좋았지만 스필버그의 영화가 주는 재미는 차원이 달랐다. 보는 순간 훅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하는 마력! 그래서 스필버그는 아직까지도 나에게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다.



그런 스필버그가 70세가 넘도록 꺼내지 못하고 간직했던 이야기가 있었다. 바로 부모님과 연결된 어린 시절의 기억이다. 천재 엔지니어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 어머니 사이에서 세 여동생들과 함께 자란 새미. 그의 부모는 영화에 흠뻑 빠진 어린 아들에게 (당시에는 매우 귀했을!) 8mm 카메라를 쥐어줄 정도로 관대하고 유복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국면에서 가정은 파국을 맞고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파벨만스>는 슬프지만 한편으로는 어느 가정에나 있을 법한 이야기를 아름답게 담아낸다. 세월이 흘러 할아버지가 된 스필버그의 기억 속에 여전히 반짝이는 어린 시절의 순간들이 영화 속에서도 빛난다. 작지도 않은 카메라를 항상 손에 들고 다녔던 영화에 미친 소년 새미. 영화가 삶 그 자체일 수밖에 없었던 소년의 서사가 소년이 찍은 영화들과 함께 물결치듯 흐른다. 평생 동안 아물지 않았던 상처도 그의 영사기로 돌리면 스크린을 수놓는 별이 될 것 같다.



새미의 부모님은 이혼이라는 선택을 하면서 새미와 동생들에게 아픈 상처를 주었지만 자신의 방식대로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사랑했다. 미치 파벨만은 아무리 말썽을 부려도 아이들을 지지해 주는 사랑이 넘치는 어머니였고 버트 파벨만은 자신의 역할을 성실히 해내면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아버지였다.


영원히 극복하지 못할 것 같은 아픈 기억도 어느 순간 돌아보면 내 삶의 일부가 되어 있다. 그렇게 끌어안을 수 있을 때까지 밀려오는 괴로움에 지지 않고 맞서려면 나를 사랑하는 누군가가 내 손에 쥐어 준 뜨거운 마음 한 조각이 필요하다.


7살 아이가 연출한 장면을 좁은 벽장 안에서 함께 돌려 보며 '지상 최대의 쇼' 못지않다고 감탄했던 새미의 엄마. 최초의 관객인 엄마를 행복하게 해 주었던 그 기억이 스필버그에게는 무너질 때마다 새겼던 뜨거운 마음 한 조각이 아니었을까?


'파벨만스'에서 새미는 여동생에게 가족을 떠나기로 한 엄마를 두고 그렇게 이기적인 사람은 없을 거라며 악담을 한다. 하지만 언젠가는 새미도 엄마가 남긴 말이 자기에게 깊이 각인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사람은 가슴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거야, 네 삶은 온전히 너만의 것이야."


자신을 꼭 닮은 아들에게 전한 말은 왠지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 같다. 이 말을 하기 위해 엄청난 용기를 끌어올렸을 수도, 아니면 그저 변명일 수도 있겠지만. 아이들에게 줄 저녁식사를 준비하면서 생각했다. 나로 살고자 하는 욕구와 가족을 사랑하는 일은 시시때때로 충돌한다. 나로 살아가지 못하는 괴로움이 지속돼 결국 가족 곁을 떠나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면 그 속도 참 속이 아니겠다.


분명히 새미의 부모는 아들을 열렬히 사랑했다. 새미의 열정에 찬사를 보내고, 새미의 재능을 지지했고 새미의 성장을 응원했다. 그 사랑이 꼭 일방향적이기만 했던 것은 아닌가 보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자신의 가족을 다룬 영화가 부모님에게 상처를 줄까 우려돼 두 분이 모두 돌아가신 후 '파벨만스'의 시나리오 작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파벨만스>는 참 뜨겁게 사랑을 다루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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