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 공허 속에서 버티는 나
고2 때, 처음으로
'이걸 해볼까?' 싶은 진로가 생겼다.
물리치료학과.
운동에도 관심이 있었고,
사람의 몸과 회복을 다루는 일이라는 점에서
어쩐지 의미도 느껴졌다.
그리고 솔직히,
그 길을 잘 밟아가면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에도 도움이 될 거란 생각도 있었다.
그때는 정말 뭔가를 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공부 루틴을 짜고, 책상 위를 정리하고,
‘이번엔 진짜 달라질 수 있겠지’라고 기대했다.
잠깐이나마 내 삶에 중심이 생긴 기분이었다.
고3이 되고 나서,
그 목표 하나 붙잡고 공부했다.
그래도 목표가 있으니
예전보다 마음이 좀 나아질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공부를 하다 보면 문득,
“이걸 정말 원하나?” 하는 생각이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그 질문은 나를 자꾸 흔들었다.
하지만 그걸 들여다볼 여유는 없었다.
“지금은 공부가 먼저니까.”
“수능 끝나고 생각해도 늦지 않아.”
그렇게 애써 외면하며
나름 집중하려 했다.
문제는,
그렇게까지 애써야만 집중이 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무너진 상태였다는 거다.
머리는 책을 펴고 있어도,
마음은 자꾸 딴 데를 보고 있었다.
남들처럼 공부에 ‘미쳐서’ 사는 친구들을 보면서
나도 다짐했다.
“이번엔 진짜 해보자.”
“나도 할 수 있어.”
그리고 잠깐은 했다.
하지만 금방 무너졌다.
그 반복이 계속됐다.
자습실에 앉아 있으면
어느 순간부터 문제집을 펴놓고 멍하니 창밖을 보게 됐다.
책상 위엔 스터디 플래너가 펼쳐져 있었지만
하루가 끝나면 채워진 건 거의 없었다.
핸드폰을 몇 번이고 만지작거리다가
결국 유튜브 한 편만 보자고 틀고,
그게 두 편, 세 편으로 늘어나는 날도 많았다.
다시 정신을 붙잡으려 해도
마음이 따라주질 않았다.
모의고사 날엔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지”라고 말하면서도
나 나름대로의 이유를 만들며 자기위로를 했다.
공부하다가 멈추고,
그런 나를 자책하다가,
괴로워서 또 책을 펴고,
결국 또 멈추는 일상.
“나도 안 한 건 아니야.”
“나도 나름 했다고.”
그렇게 나를 감싸 안으면서도
속으로는 끝없이 비교했다.
“나는 왜 이렇게밖에 못할까.”
“남들처럼 확신을 가지고 달려가질 못하나.”
그 시절의 나는
무기력했던 게 아니라,
방향을 잃은 채 버티고 있었던 거다.
남들에게는 공부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누가 보면 그냥 ‘공부하는 고3’처럼 보였겠지만,
내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의지로 눌러놓은 질문들이
자꾸 마음속을 갉아먹고 있었고,
그걸 외면할수록
나는 점점 아무 감정도 느낄 수 없게 됐다.
수능이 가까워질수록
나도 더 열심히 해보려 했다.
하지만 솔직히,
남들처럼 매일같이 눈에 불 켜고 달리지는 못했다.
집중하려 애쓰고,
‘이번엔 제대로 해보자’ 다짐도 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계속 가라앉았다.
그게 너무 힘들어서,
그냥 수능만 끝나면 생각해 보자고
나 자신을 달래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포기한 건 아니었다.
다만, 끝까지 달릴 수 없었다.
남들과 비교하면 부족하다는 걸 알았고,
그게 죄책감처럼 남았다.
나는 안 한 게 아니었다.
다만, 해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이 있었다.
수능이 끝났다.
긴장이 풀린 건 맞는데,
막상 마음이 편한 건 아니었다.
딱히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그저, 멈춰있던 시간이 갑자기 풀린 느낌.
오랜만에 밤이 길게 느껴졌다.
책상에 앉지 않아도 되는 저녁.
모처럼 마음껏 늦게 자도 되는 날.
평소 같았으면 기뻤을지도 모른다.
근데 그날 밤,
나는 자꾸 같은 생각에 머물렀다.
“이제 뭐 하지?”
사실 해보고 싶은 건 있었다.
공부 말고,
게임도 맘껏 하고 싶었고 못봤던 영화, 드라마도 보고 싶었다.
정말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또 그동안 미뤄둔 관심사,
사업을 해보고 싶단 생각
다이어트 하고 싶단 생각 등등
막연하게 떠오르는 것 들이 있었지만
막상 손이 가지 않았다.
자유는 생겼는데,
마음이 아직 거기까지 따라오지 못했다.
몸은 가벼운데
머릿속은 뿌연 안개 같았다.
이제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아직 잘 모르겠다는 걸
그날 밤 처음 느꼈다.
그래서 나는,
그저 가만히 누워
조용히 다음 날을 기다렸다.
끝은 맞았는데,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
잘 모르겠던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