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야만 보이는 패턴들에 대하여

현실에서는 한 번 죽으면 끝이라고 믿었던 나

by youngvocati

픽셀 표지를 만들다가,

화면 한가운데에 커다랗게 이런 문장을 올려 두었다.


YOU DIED


그 아래에는

CONTINUE?


짧고 단순한 영어 두 줄인데,

한참 동안 그 문장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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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RPG를 오래 붙잡고 있었던 타입은 아니었다.


스토리가 길게 이어지는 게임보다,

한 판 한 판 머리를 많이 써야 하는 전략 게임들을 더 좋아했다.


턴을 계산하고,

유닛의 위치를 조정하고,

상대의 수를 예측해 보는 쪽이 더 재미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억 속에 가장 또렷하게 남아 있는 화면은


정교하게 짜인 승리의 엔딩 화면이 아니라,

한 순간에 무너졌다는 것을 알려 주는


짧은 문장 하나였다.


YOU D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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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첫 판은 그렇게 끝난다.


보스의 패턴도 모르고,

어디서 어떤 공격이 나오는지도 모른 채,


어디로 도망쳐야 하는지도 모르고

한 번에 수치가 깎여 나가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캐릭터가 바닥에 쓰러진다.


YOU DIED.


처음에는 억울하다.


내가 못 해서라기보다는

그냥 정보를 몰랐던 것뿐인데,


게임은 그런 사정을 들어주지 않고

결과부터 먼저 보여 준다.


그래도 사람은 이상해서,

거기서 매번 같은 버튼을 누른다.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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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을 반복하다 보면

죽는 순간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보스가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죽었다면,

다음 판에는 최소한 첫 공격은 피한다.


다음에는

체력이 절반쯤 깎이면

패턴이 완전히 바뀐다는 것도 알게 되고,


또 다음에는

지도 구석 어딘가에

잠깐 숨을 고를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여전히 죽기는 죽는데,

그 죽음 안에 들어 있는 내용이 달라진다.


처음의 죽음은

그냥 끝나는 장면이었지만,


몇 번 되풀이된 뒤의 죽음은

다음 판에서 써먹을 수 있는 정보가 된다.


그래서 게임에서의 죽음은

언제까지나 쓰라리기만 한 건 아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죽었다는 화면을 본 뒤에

손가락이 자동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이번 판에서는

그래도 여기까지는 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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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구조를

게임 안에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현실에서는

정반대의 규칙을 적용해 왔다.


다이어트를 시작했다가

몇 번 폭식하면


나는 곧장 이렇게 말했다.


“역시 나는 의지가 약해.”


새벽 기상을 결심했다가

몇 번 늦잠을 자면


“나는 아침형 인간이 아니야.”


공부 계획표를 세웠다가

일정이 어그러지면


“계획이라는 건 나랑 안 맞는 것 같아.”


게임이었다면

첫 판 죽고 나서

CONTINUE를 누르겠지만,


현실에서는

한두 번 무너지면

그냥 게임 자체를 삭제해 버리는 쪽을 골랐다.


YOU DIED.


라는 문장이 떠오르는 순간,

CONTINUE?라는 질문은

아예 보기 전에

“아, 이건 나랑 안 맞는 게임이구나.”

라고 혼자 결론을 내리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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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섯 주는

그런 나로서는 드물게


그래도 한 번 더

계속해 보려고 했던 시간이었다.


몸을 바꾸겠다는 계획,

공부를 밀리지 않게 따라가겠다는 마음,

브런치에 글을 꾸준히 올려 보고 싶다는 생각.


어느 것 하나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이번만큼은

조금 더 오래 붙들어 보고 싶었다.


결과만 놓고 보면

이 여섯 주가

빛나는 성공이었던 것은 아니다.


루틴은 중간중간 깨졌고,

계획표는 여러 번 수정되었다.


어떤 주에는

운동을 가지 못한 날이 더 많았고,

어떤 주에는

글을 쓰지 못한 날이 더 많았다.


표로 정리해 보면

여전히 여기저기 빈칸이 보이는 여섯 주였다.


게임 화면으로 치면

같은 보스에게

여러 번 쓰러지던 시간에 가깝다.

늘 비슷한 타이밍에,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이유로 무너지던 장면들.


예전의 나라면

그걸 한 줄로 정리했을 것이다.

“역시 나는 이런 게임을 끝까지 못 가는 사람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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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표지를 만들며

YOU DIED라는 글자를

한참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게임에서는

이 문장이

“오늘 여기까지 공략했다”는 뜻이기도 했다는 걸.


죽는다는 건

거기까지는 도달했다는 뜻이다.


첫 판에는

보스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죽지만,


몇 판 지나면

안 보이던 패턴이 보인다.


그때부터의 죽음은

그저 끝이 아니라

내가 어디까지 왔는지를 보여주는

조용한 기록이기도 하다.


그런 기준으로 보면

지난 여섯 주 동안의 나도

그냥 실패한 사람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피로가 쌓이는 목요일 밤에

가장 쉽게 루틴을 놓친다는 걸 알게 되었고,

사람들과의 약속이 몰리는 주간에

가장 크게 흐트러진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글이 막히는 날에는

나 자신에게 유난히 가혹해진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건

내가 약해서만이 아니라


내 삶의 보스전에서

어느 구간이 2 페이즈인지,

어디서 광역기가 날아오는지를

조금은 알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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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번 7주 차 수요일에는

실패를 조금 다른 방식으로 불러 보기로 했다.


예전의 나는

“또 죽었네.”

까지만 말하고 게임을 껐다.


앞으로의 나는

한 줄을 더 붙여 보고 싶다.

“또 죽었네.

이번에는 여기에서.”


목요일 밤에 무너지면

그 밤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약속이 몰리는 주간에 흐트러지면

그 주간에 무엇을 우선순위에 두었는지,


글이 써지지 않는 날에 도망쳤다면

그날 어떤 생각을 가장 두려워했는지,


조금 더 자세히 적어 보는 사람.


게임 속에서

보스를 공략할 때처럼,

내 삶에서 반복되는 패턴을

조금 더 선명하게 그려 보려는 사람.


그 일을 계속하고 있는 동안에는

YOU DIED라는 문장이 떠 있어도,

CONTINUE?라는 질문에

아직은 YES라고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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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에 쓴 이 글이

내 인생의 보스를 깼다는 보고서는 아닐 것이다.


다만

죽음을 한 번도 겪지 않고

클리어한 전설이 되는 대신,


여러 번 죽어 가면서도

조금씩 더 멀리까지 가 보는 플레이어가 되는 일.


이번 주의 나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믿어 보기로 했다.

언젠가 이 시기의 브런치 연재를 돌아봤을 때,


여기에는

성공담 대신

“여러 번 죽었지만,

그때마다 패턴을 조금씩 더 배워 온 사람”의 기록이

남아 있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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