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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영 Nov 20. 2018

서른 살, 다시,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삶으로

파리의 이방인 둘.

2018년 3월, 만 서른이 된 나와 남편이 프랑스 파리에 왔다. 

이제 몇 년간 어디로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앞날을 맞게 된 것이 재미있고 기대된다.

흐리고 비오는 3월, 어쩌다 하늘 갠 날의 에펠탑.

퇴사와 유학. 

대담한 결정이라고들 하고, 분명 어떠한 '결단'인 것은 맞지만, 힘들고 어려운 결정은 아니었다. 


취업 후 몇 년간 일을 하면서 나를 채우고 키우는 일에 대한 갈증이 커졌다. 내 직장의 역할과 책임으로부터 보람을 얻을 수 있었지만 이 몇 년은 그 보람을 느끼기보다는 한계와 아쉬움을 더 자주 느꼈던 것 같다. 영화를 사랑하고 영화와 관계된 일터에 있지만 몇 년이 지나도 나는 그냥 현재의 그 모습일 것 같았는데 그것이 좀 답답했다. 진지하게 책을 읽고 진지하게 영화를 보고 시간을 들여 고민하고 사유의 조각을 서로 얽는 활동이 고팠다. 그리고 지금 이맘때가 제일 적기인 것 같았다. 이 생활 그대로 시간이 더 흐르면 그렇게 생각하는 일에 시간을 들이기는 점점 더 어려울 것 같았다.  


기본적으로 나는 여행을 너무 좋아한다. 낯선 곳에서 낯선 것들을 마주할 때의 그 설렘과 긴장이 좋고, 낯선 자로서 그곳에 녹아드는 일이 즐겁다. 여행을 너무나 좋아하는 것은 남편, 그땐 남자친구였던 이비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우린 늘 '언젠가 세계여행'을 얘기하곤 했었는데 언제부턴가 거기에 '해외 유학'이 끼어들었다. 그도 취업을 하고 나서는 이것이 더욱 현실의 주제가 되었다. 얘도 퍽 갈증을 느끼고 퍽 변화를 꿈꿨나 보다. 우리는 몇 년을 지내려면 얼마의 돈이 필요할지, 여행경비와 학비 모두 마련해서 떠나는 것이 가능할지, 너와 내가 함께 공부하기에 어느 나라가 좋을지, 최후에 다시 한국에서 일하게 될 것을 고려할 때 우리의 경력과 나이... 등 생각해야 할 것들을 어느 날 커피 마시며, 어느 날 마트에 가다가, 어느 날 전화통화를 하며 하나하나 맞춰나갔다. 그리하여 '세계여행'은 살짝 서랍 안에 넣어두고 '해외 유학'을 우리 삶의 타임라인에 올려두었다. 짜잔. 결혼과 함께.


한번 타임라인에 놓고 나니 기대감과 함께 묘한 목표의식 같은 것이 생겼다. 빨리 우리의 현실이 되었으면 했다. 유학시기를 앞당긴다는 건 그만큼 한국에서 모으는 돈이 줄어드는 것이지만, 결혼 비용을 줄이고 유학생활에서의 예산을 타이트하게 잡고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1년을 앞당겼다. 그래서 우린 2017년 12월, 재미있게 결혼을 했고, 2018년 3월, 내가 생일을 보내고 만 서른이 되자마자 프랑스에 왔다. 꺅!!


꺅, 이라곤 했지만 사실 일상에서 전혀 '꺅'은 없다.

소속 없는 삶이 오랜만이고 소속감이 주는 안정감과 편안함이 참 크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아, 나는 소속되어 있기는 하다. 남편은 퇴사를 했지만 나는 휴직을 한 터라, 한국에서 나의 신분이 안정적이라는 것이, 둘 중에 하나가 그렇게 어딘가 발을 붙이고 있다는 것이 어쩐지 든든하다. 어쨌거나 그건 심리적인 든든함이고, 여기에서는 외국인 유학생으로서 생활에서 마주치는 크고 작은 행정들을 하나씩 해나가기에 내가 아무런 신용이 없는 사람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그러나 이 나라는 이런 나에게도 참 많은 복지가 갖추어져 있다). 

매일 지나치던 노트르담 대성당, 수시로 세일하며 내 눈을 사로잡는 그릇과 컵들, 그리고 내 입맛을 높여가는 양질의 디저트들...

언어의 장벽 앞에 이방인 아닌 척할 수도 없는 곳에서 무소속의 삶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사는 것은 역시 약간의 스트레스와 걱정을 준다. 그렇게 하루 이틀 보내다가도 문득 느낀다. 나의 1년 후, 2년 후가 빤히 그려지지 않는 것이 즐겁다는 것을.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하고 퇴사를 하고 또 취업을 하고, 어느 정도 평탄한 미래가 그려지는 길을 걷다, 다시 스스로 내 앞에 수많은 갈랫길을 깔아버렸다. 열심히 프랑스어 공부해서 파리의 국립대 가서 석사를 할지, 영어로 그랑제꼴 가서 등록금 왕창 내고 석사를 할지, 그 돈은 어떻게 구할 건지, 공부 말고 여행을 하게 될지, 영화산업에 종사할 것인지, 바닷가에서 숙박업을 할지, 아무것도 아직 모르겠다. 고민하고 노력해서, 기대되는 발자국을 또 내딛는 것이 내가 이 곳에서 할 일이다. 무한정 고민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내가 가진 시간은 딱 내가 가진 돈만큼이니까. 한국에 있었더라면 각자의 자리에서 보냈을 몇 년의 시간보다 이것이 값질 것이라 단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참 소중한 시간이다. 훗날에 생각해보더라도 그럴 것 같다. 내게 생산적이고 주체적인 시간. 


그래서, 어디로 어떻게 풀릴지 아직 잘은 모르겠으나 어쨌거나 일단은 공부하는 사람이다. 아, 알바도 한다. 벌어온 돈 갉아 쓰는 유학생의 삶은 절대 만만치 않음을 상기시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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