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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영 Nov 24. 2018

'너무 잘 지내' 뒤에 숨은 것들 (1/2)

유학생의 그늘, 첫번째 이야기

서른 즈음의 나이에 휴직 그리고 퇴사 후 파리에 온 신혼부부에게, 사람들이 안부를 물어오면 짧은 고민에 빠진다.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얼마나 설명을 해줘야 할까. 결국 내 입과 손에서 나가는 말은 그들 대부분이 기대하고 있는 대답이다. 
"나 너무 잘 지내고 있지!"

나는 정말 잘 지내고 있다.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주는 사람도, 돌아가는 모양이 부당하거나 이해가 가지 않아서 속 뒤틀리는 일도 없다. 당장 이뤄야 하는, 기한 내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목표점도 없다.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보는 내 일상은 평화롭고 제법 규칙적이다. 어학원에 가고, 숙제나 공부를 하고, 가끔 영화보고, 남편과 장보고, 
요리를 해서 와인과 함께 밥먹고, 때때로 친구를 만난다. 유학생이니까 공부가 주된 할일이지만 날마다 해내야 하는 분량은 없다. 내가 원하는 만큼, 내가 하고자 하는 부분을 공부한다. 남에게 바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고스란히 내 안에 쌓이는 내용이기에 그 시간과 노력이 헛되지 않다. 


게다가 여기는 파리 아닌가. 파리 고유의 로맨틱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아름다운 건축물이 즐비한 거리를 날마다 걸어다닌다. 역사 깊은 문화유산이 도처에 널려있다. 이를 즐기러 온 관광객들로 도시가 붐벼서 번잡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이들 덕분에 작은 흥분감과 활기 또한 더해진다. 주변을 잊고 살다가도, 세느강 근처를 지나다 바토무슈에서 환성을 지르는 관광객들을 만나게 되면 문득, 아 내가 파리에 살고 있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 날은 흐릴 때가 많지만 잠깐 비가 내리고 나면 대기가 더욱 맑아져 눈앞의 광경이 더욱 맑게 반짝거린다. 구름이 걷히고 내리쬐는 햇빛은 한국에서 맞는 햇볕보다 묘하게 더 날카롭고 뜨거운데, 햇볕을 좋아하는 내게 딱이다. 파리의 겨울이 지난하다고들 하지만, 지금까지 겪은 봄에서 가을은 그때그때마다 아름답다.


에펠탑 주변을 조깅하는 호사로움
라파예뜨 백화점 옥상에서 바라보는 오페라(빨레 갸르니에), 그리고 에펠탑. 흐려도 아름다워.
해가 져도 아름다운 세느강변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파리 유학생의 꽃같은 일기다. 그리고 당연히, 유학생에게는 그늘이 있다. 

너무 쉽게 충족했던 욕구들이지만 어느 정도 포기하고 사는 것들. 단연 대표적인 건 음식이다. 애초에 빵, 그밖에 밀가루로 된 음식, 느끼한 음식을 좋아하고 고기, 생선, 샐러드 골고루 먹는 것을 좋아해서 한식을 잘 못 먹는 것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 해먹으려고 들면 부지런히 할 수 있지만 아무래도 요리 준비 과정이 더 많고 번거로워서 자주 해먹지 않는다. 하지만 한번 한식을 먹으면, 내 속 깊은 곳 어딘가에서 크나큰 감동이 밀려온다... 


그리고 머리. 항상 밝은 염색톤을 유지해왔고 좀 길었다 싶으면 냉큼 잘라버리는 단발 마니아였는데, 여기에 와선 8개월째 머리를 기르고만 있고 염색은 셀프 뿌염 중이다. 미용실 비용을 알아봤더니 컷트는 한국보다 비싸고 염색은 생각만큼 비싸지 않아서 한번 가봐야지 싶었는데, 정작 내 돈 갉아먹으며 지내다 보니 미용실 가기를 미루게 된다. 남편 머리를 보고 있어도, 매달 머리를 자르면 좋겠는데(긴머리는 안 어울린다) 그럴 순 없으니까 3-4개월을 기르다가 자른다. 

그외에도, 어느 날 갑자기 치솟는 한글 활자본을 마구 읽고 싶은 욕구. 그맘때 우연히 '밀리의 서재'라는 구독 서비스를 알게 되어 1개월 무료 체험으로 소설과 에세이를 몰아 읽었다. 영어, 프랑스어를 읽는 것과 달리 빠른 속도로 페이지를 넘기면서도 감정을 이어나갈 수 있어서 행복했다. 또 한국 드라마를 보고 싶은 욕구, 제주도에 가고 싶은 욕구, 엄마가 보고 싶은 마음 등... 한국을 떠나기를 선택했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댓가는 고스란히 내 몫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보다 더욱 사무치게 느끼는 쓴맛은 바로 경제적 현실이다. 
그렇게 회사를 욕하고 퇴사를 고민하다가도 수많은 직장인들이 쉽게 회사를 그만둘 수 없는 큰 이유 중 하나는 꼬박꼬박 통장에 꽂히는 급여가 주는 안정감과 편안함일 것이다. 유학가겠다고 돈을 모으고 있었어도, 맨날 돈없다 돈없다 하면서도 나 또한 내가 만족할 만한 정도의 삶을 유지했었다. 어차피 남편과 나는 돈이 어디서 퐁퐁 솟아나와서 쓰고 싶은대로 마음껏 쓰던 사람도 아니었다. 함께 (최대) 3년 정도의 예산을 모아 온 우리는 즐기면서 살되, 한국에서 살던 것보다 좀더 절약하는 태도로 살았다. 밖에서 밥이나 술을 잘 먹지 않았고 쇼핑을 자제했다. 그러나 돈은 예상치 않은 곳에 묶였고 예상보다 많이 쓰였다. 이곳에서 월세 집을 얻기 위해 월세 1년치를 은행에 고스란히 묶어둬야 했고, 집에 부족한 것들을 사들이느라 - 이를테면 침대, 이불, 베개, 스탠드, 의자, 후라이팬 등 - 쓴 돈도 제법 됐다. 5월 칸, 6월 비아리츠, 7월 한국친구의 방문, 8월 보르도, 9월 한국친구의 방문으로 한 달에 한 번은 여행하듯 살았다. 월세와 생활비가 나가는 프랑스 현지 은행의 한 달 지출내역을 확인할 때마다, 매달 생각보다 돈이 많이 나간다고 서로 놀랐는데, 심지어 여행지 호텔 혹은 에어비앤비 결제금액은 한국통장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와중에 중단이 불가하거나 아직 중지할 수 있는 만큼 납입횟수를 채우지 못한 한국의 의료실비보험, 연금저축보험 등에도 일정한 금액을 계속 납입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8월, 현실을 직시했다. 이대로 가다간 10월에는 정말 빈털터리가 되거나, 아니면 당초 3년 예산 중 1년치를 저축해 둔 정기예금의 일부를 털거나, 어쩐지 깨기는 아까워서 남겨두고 있던 주택청약저축 등을 해지하거나, 하여간 어디서든 돈을 끌어와야 하는 것을.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직은 나중에 쓰자고 묶어둔 돈을 빼 쓰고 싶지 않았다. 이제 겨우 유학 8개월 차인데. 아직 우린 본격 공부를 시작한 것이 아니니까, 시간과 심적인 여유가 있으니까, 여건이 되는 지금 돈을 벌어오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르바이트를 구하라. 그것은 9월이 오기 전, 우리가 실행해야 할 중요한 임무가 되었다.


(다음편에서 계속)


우리 아파트 1층집에 사는 고양이. 아파트 정원이 자기 거다. 예뻐 죽겠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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