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나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오래 일하고 싶은 사람이구나. 편안하게 노후를 보낼 수 있는 재정적 여건이 된다면, 더더욱 벌이에 대한 부담을 내려놓고 자유롭게 일 하고 싶을 사람이구나.
학부시절 '상상력'이라는 학회가 있었다. '더 나은 사회를 상상한다'는 다소 거창한 기치 하에, 선후배들이 한 주에 한 번 원탁 형태로 마주 앉아 자유 주제로, 찬반 토론보다는 토의를 하며 4시간가량을 보냈었다. 그 학회에 들어가기 위한 시연 세미나의 주제가 '직업의 의미'였다. 사실, 세미나 내용이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때는 왜 그렇게 원탁에서 말을 꺼내는 게 힘들었는지. 말을 시작하면 수십 개의 눈알이 말 그대로 전 각도에서 나에게 쏟아지는 그 공간적 배치가 너무 부담스러웠다. (사실 아는 사람만 알지만, 나는 식당에서도 내가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자리 배치를 꽤나 신경 써서 앉는 편이다.) 그렇게 앉아있는 것 만으로 손에 식은땀이 났는데 토론에 원활히 참여할 수 있을 리가. '우리는 꼭 직업을 가져야 하는가?' '일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등의 질문은 나에게 너무 뜬구름 잡는 질문이었고, 토론 내용은 꽂히지 못하고 겉돌았다. 뭔가 심오한 논의가 오갔던 것 같긴 한데, 지금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사실 그렇게나 많은 시간을 일에 쏟아야 하는데 일이 의미가 없으면 행복하기 쉽지 않겠다"라던 나, 혹은 누군가의 발언 정도이다.
그 질문을 다시 떠올리게 된 건, 5년이 지나서였다.
스타트업에서 2-3년 정도 일을 하면서 잠시간 큰 불안이 왔던 시점이 있었다. 주변에서 지속적으로 받는 '너는 그 회사에 언제까지 있을 거야?' '너는 창업을 하고 싶은 거야?'등의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인 경우가 더 많고, 그렇기에 온전히 나의 진심과 고민을 담아 매번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고, 매번 나 자신을 점검할 필요 없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주곤 했다. 그럼에도, 스스로에게 의심 섞인 질문이 전달되고 있었나 보다. "그래서, 너는 뭐하고 싶은데?"
그 시기에, 이 고민을 남에게 이야기하지 않고 혼자 해결해보자고 다짐한 건 꽤 잘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마침 구독 중인 뉴스레터에서 모 대표님이 자신은 불안할 때면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을 읽는다는(!) 말을 했다. 아, 생각해보니 이 책은 위에서 언급한 학회에서 진행한 '불안'에 대한 세미나에서 언급된 책이기도 했다. (여러모로 20대 초반들이 모여서 참으로 진지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더랬다.) 홀린 듯이 책을 주문하고, 그 주 내내 책을 읽었다.
불안이라는 감정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그리고 그 불안을 극복해나갈 수 있는 근본적인 방법은 무엇인지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따라가면서, 아래와 같이 독후감에 적었다.
중세에는 기독교적 관념을 바탕으로, 세속적 지위와 한 사람의 내재적 가치가 동등하지 않다고 인식되었다면, 근대에는 초기 기회가 균등히 분배된다고 여겨지면서, 성공 여부가 개인의 내재된 속성에 달린 것으로 이해되었다. 즉, 능력주의적 사고가 시작된 것이다. 부는 개인의 도덕성과 결부되었으며, 부의 부재는 개인에게 가난에 더하여 수치심을 주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사랑받고 싶어 한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은 절대적인 반면 부는 절대적이지 않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때 일시적으로 사람은 부유해지지만, 원하는 것이 점점 많아지고 성취하지 못하는 욕심이 늘어갈수록 개인의 자존심은 떨어진다. 사랑받을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각자의 부의 기준을 세울 필요가 있다. 이성(理性)으로써, 내가 원하는 것이 정말로 갈구할 가치가 있는 것인지를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주변 사람들의 코멘트 하나하나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편집자로서 코멘트들을 이성 박스를 거쳐 나에게 전달하거나 삭제해내는 작업을 해야 한다.
사회가 공동체를 덜 책임질수록, ‘평범’해서는 안된다는 조바심이 더 커진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 청년들의 불안도가 더 높나 보다. 점점 비혼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고, 결혼을 하더라도 보금자리조차 마련하기 쉽지 않은 현실 속에 점점 조바심이 늘어간다.
결국, 개인의 불안이 점점 커져가는 구조 속에서, 내가 원하는 삶의 핵심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삶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렇게 내가 원하는 삶의 모습들을 써 내려가다 보니, 어쩐지 '와 정말이지 이런 삶을 살고 싶어!'라는 생각보다, '이렇지 않은 삶을 살다가 죽음을 맞는다면 정말 허무할 것 같아'라는 생각이 강해졌다. 아닌 게 아니라, 불안이라는 감정은 사실 후자의 생각과 더 닮아있었다. 두려움.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불안은 비롯되는구나.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내가 정의한 나의 두려움은 '나의 능력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죽는 것'이었다. 내가 가용할 수 있는 자원- 일군 것이든 주어진 것이든-이 많은 상태에서, 이것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여 세상에 할 수 있는 기여를 하지 못하고 죽는 것에 대해, 그리하여 나 자신에 대해 좋은 평가를 내릴 수 없는 상태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나의 능력을 펼치게 해주는 매개체인 '일'은 나의 삶의 핵심 중 하나였다. 5년이 흘러 스스로에게 다시 던진 질문, '일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에 '나의 가장 큰 욕망 중 하나'라는 솔직한 답을 내렸다. 사실 그간 일의 형태를 국소적으로 생각하면서 -조직에 속해 조직의 구성원으로 일하고 임금을 받는 형태- 일이 내 생에 중요한 요소라고 땅땅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일종의 반항심도 있었다. 일의 형태가 굉장히 다양하다는 점을 이해하게 된 것도, 일에 대한 나의 마음을 정의 내리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정리하고 나니, 현재 내가 집중해야 할 것들의 가지가 쳐졌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지속 가능하게 일 할 수 있을만한 상태를 만드는 것이고, 그를 위한 재료들은 다음과 같았다.
1. 좋은 일을 꿈꿀 수 있는 바른 가치관
2. 꿈꾸는 일을 언제든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실력과 실행력
3. 그 일을 함께할 수 있는 사람들
4. 그런 사람들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을 보는 안목
5. 그런 사람들에게 선택받을 수 있는 인격
현재 내가 몸담고 있는 일상 속에서, 나는 이 다섯 가지를 발전시키고 있는가? 그렇다면 불안해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변화가 필요하다. 나의 두려움을 마주하자 집중해야 할 것들이 명확해졌고 소모적인 작은 불안이 사라졌다.
알 수 없는 불안에 회의감이 들 때면,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나는 요즘 불안한가? 지금 내 삶의 두려움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지금 이 불안은 나의 본질적 두려움이 나에게 주는 시그널인가, 소모적인 잡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