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제니 Nov 22. 2020

잘 적힌 글이 백 마디 말 보다 낫다

글을 쓰는 이유에 관하여

말을 잘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던 시기가 있었다. 학부 시절 말하기 동아리를 이리저리 기웃거리기도 하고, (매주 스피치 비슷한 걸 해야 한다는 말에 결국 가입은 하지 않았다) 학회에서 참가하던 국내 대회에서 꼭 발표를 맡아 무대에 서고 싶어 했던 것도, 떨지 않고 발표를 해내고 박수를 받는 그 순간이 너무나 벅차 보여서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말하기에 흥미가 똑, 떨어졌다. 아마도 회사 생활을 시작하고 2년 차쯤 접어들었을 무렵일 것이다.


완벽주의가 한몫을 했다. 연차는 소소하고, 가지고 있는 전문성은 소박했으며, 갖고 있는 생각도 시시각각 변해갔으므로, 이리 튀고 저리 튀는 머릿속 미숙한 생각들을 밖으로 꺼내보이고 싶지 않았다. '공해'를 만들어내고 싶지 않았다고 하면 너무 가혹한 워딩일까?


가장 큰 이유는, 결국 생각이 영글려면 경험과 지식이 꼼꼼히 축적되어야 함을 깨달은 것에 있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수사나 무대 기술, 청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아니라 콘텐츠라는 진리를 깨우친 것이다.

이는 이따금 참석한 컨퍼런스에서 여러 연사를 보면서도 느낄 수 있었다. 막힘없는 언변과 화끈한 무대 매너(?)로 청중을 깨우는 연사가 있는가 하면, 발음도 조금은 새고, 약간은 나른하며, 때로는 긴장감이 여실히 전달되는 연사도 있다. 허나 많은 무대를 접할수록, 기억에 남는 연사는 오히려 후자인 경우가 많았다. 언변은 모자랄지라도  자신의 경험을 재료로 자신이 납득한 서사를 구성하여, 과장 없이 스토리를 풀어내는 사람. 필자가 선망했던 '말 잘하기’의 핵심은 '경험에서 나오는 진정성 있는 스토리' 그리고 그 스토리에 대한 '본인의 확신'이지, 그 외의 요소들 - 발성, 말을 공백 없이 이어나가는 능력, 심지어는 메이크업까지-은 모두 부차적이라는 (때로는 오히려 역의 관계에 있기도 하다는) 점을 깨닫고는 말에 대한 로망을 접었다.


이런 생각이 들 무렵 책을 읽기 시작했던 것 같다. 20대 초반에는 해에 한두 권을 읽을까 말까 했는데, 점점 읽는 양이 늘고, 장르도 다양해졌다. 읽다 보니 '책 취향'이 생겼다. 진솔하고 꾸밈없이, 조금은 겸손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책, 그리고 일상에서 나온 통찰을 담은 에세이와 소설 쪽으로. 읽다 보니, 자연스럽게 쓰고 싶어졌다. 망설이던 필자에게 불을 지핀 건 전 29cm 헤드 카피라이터 이유미 님의 신간 <일기를 에세이로 바꾸는 법>이었다.


말과 글은 둘 다 사고 회로 속의 관념들을 꺼내는 수단이다. 말은 (물론 어떠한 세팅에서 진행되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개는) 즉흥적이고, 관객과 실시간으로 공유되며 상호작용이 가능하다. 반면 글은 구현하는데 긴 시간을 들일 수 있는 만큼 사전 준비와 검토가 용이하다. 대상과의 실시간 상호작용이 불가하고, 그렇기에 전달 과정에서의 변수는 적다.

초등교육 교과서에서 본듯한 표

개인의 성향에 따라 각각의 요소가 장점 혹은 단점으로 작용하는 여부는 다를 수 있다. 다만 말을 잘하고 싶던 사람에서 글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의 변화 과정을 되짚어보니, 글의 몰랐던 매력을 발견하게  것이 사실이다. 어쩌면 원래부터 글을 좋아했으나, 말의 '멋짐'을 취하고 싶어 적잖은 시간 방황하다가, 외면하던 글의 순기능을 인정하고 글을 가까이하는 과정에 있는 것일지도.


글을 좋아하게 된 이유


글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결국 '준비와 검토가 가능하다'는 장점에서 기인한다. 오랜 시간을 들일 수 있고, 그렇기에 꼭 필요한 말을, 많은 고민을 담아, 준비가 되었을 때 또렷하게 전할 수 있다는 특성.


1. 훅 치고 가는 타율이 높다

방황하던 순간들에 나를 훅 치고 갔던 구절들은 대체로 상대방이 인생을 통해 얻은 깊은 인사이트였으며, 그것들은 충분한 맥락이 전달될 수 있는 시공간적 세팅에서만이 전달될 수 있었다. 그것은 한두 시간 남짓한 짧은 커피나 밥 자리에서 전해지기보다는 당사자의 글, 혹은 출간한 책을 통해 얻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더불어 책에 밑줄이 지나간 자리에는, 작가가 여러 경험을 엮어내 얻은 배움을 명료하게 전달하기 위해 단어와 문구를 여러 차례 조합한 습작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렇게 정성껏 짜여진 한 줄은 경쾌히 내 마음속에 '저장'된다. 책을 한 권 읽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만, 내 마음을 '훅' 치고 가는 타율('훅성비'라고 불러도 괜찮을까?)은 오히려 높다.


(물론 짧은 대화 속에도 상대방의 인사이트를 끌어내는 사람들이 분명 있다. 상대방을 편안하게 만들 줄 알고, 상대방의 진짜 이야기를 끌어낼 줄 아는 능력의 소유자. 이런 사람들은 상대방이 잠시 말하다 길을 잃어도 '찰떡'같이 알아듣고 그 속의 주옥같은 통찰을 수신하는 감도 높은 수신기를 달고 있다. 그런 사람들을 필자는 진심으로 부러워한다.)


2. 글로 나의 마음을 오해 없이 전달했던 경험

일을 시작한 첫 해였을까. 스타트업이라 좁은 공간에서 함께 하루 종일 붙어있다 보면 굳이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도 가릴 막 없이 동료들에게 보이는 경우들이 있다. 칸막이도 없고 '사회적 거리'라고 부를 만한 공간적 여유도 없었기에 안에 쌓인 피로감이 살짝만 묻어 나와도 여과 없이 옆 사람에게 전해지던 공간이었다.


동료에게 급박한 마감일과 함께 기획을 전한 상황에서, 동료가 '너무 급하게 만드는 것 같다'는 코멘트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업무의 타임라인을 맞추는 체계도 부족했고, 지금에 비해 업무 숙련도도 낮았으며 서로의 업에 대한 이해도도 떨어졌었다. 당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나는, 그 말에 담긴 여러 층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이었다면, 급하게 전달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는지 혹은 구조적으로 이러한 일이 반복되고 있는지,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동료가 요즘 힘든 일은 없는지에 대해 대화를 나눠보지 않았을까.)

크게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기에 필자가 어떻게 반응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늦은 밤, 그 동료에게서 한 통의 긴 메일이 왔다. 요즘 일이 힘들지는 않은지 안부를 묻는 것으로 시작한 메일에는 그날 자신이 한 말에 대한 사과와 함께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에 대한 설명, 이에 대해 앞으로 우리 팀이 어떻게 협업을 하면 좋을지에 대한 진솔한 고민이 담겨있었다. 글의 마무리는, 필자와 일하는 것을 즐겁게 생각하고 있다는 감사한 고백이었다.


글의 힘이 참 강하다는 걸 그때 느꼈다. 급하게 뱉는 것이 아니라 한나절, 혹은 그 이상을 숙성시켰다가 고르고 고르 단어에 상대방에 대한 배려를 얹어 전달하는 글에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구나. 쓰는데 들인 정성은 읽는 사람에게도 전달되어 여러 번 곱씹어 읽게 하고, 그래서 결국에는 화자의 마음을 곡해 없이 전달하게 하는구나.


사회생활의 다이내믹 속에서, 상대방과 나의 입장이 충돌될 때는 '정정당당하게' 상대방과 대면하여 '말로' 풀어야 한다고 믿던 시절이 있었다. 동료의 편지는 그런 필자의 생각을 바꿔놓았다. 정정당당히 상황을 마주함은, 꼭 얼굴과 얼굴이 맞대어져야만 하는 일은 아니다. 오히려 필요한 일은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마주하고, 상황을 여러 각도에서 충분히 생각해보고,  자신이 대화할  있는 마음의 상태가  때까지 기다린 뒤,  의사를 전달했음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말이 상대에게 ' 닿는 '까지를 말의 책임으로 생각하여 표현을 다듬고  다듬는 . 그것이 진짜 '마주함'이고 그래서 글은 좋은 '마주함'의 수단이다.


좋은 깨달음은 선순환을 낳는다. 어느 날, 내 마음에 속상함을 남긴 한 동료의 말에, 긴 메일을 썼다. 마찬가지로 한나절 뒤에 받은 동료의 진심 어린 긴 답장의 끝에는, '말이 아닌 글로 적어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준 배려에 감사하다'고 적혀있었다. 그 구절을 읽은 것으로, 정말 충분하다, 는 생각을 했다. 하루 종일 얼어있던 마음이 녹았다.


결국 말이나 글을 구현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내 의사가 상대방에게 (진정한 의미에서) 전달되는 빈도'를 높여가는 것이다. 말과 글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중요한 것은 내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에 대한 충분히 고민했는가, 그리고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상대방에게 가 닿는 것에 있어서 작가, 혹은 화자로서의 책임을 다하였는가로 요약할 수 있겠다.

작가의 이전글 서브웨이를 먹으며 든 생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