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고 싶었다

by 정영욱

글을 쓰고 싶었다. 특별할 것 없는 이 글자들을 쓰인 문장을 보고 있으면 마치 누군가 정말?이라고 묻는 것만 같다. 나에게 어색하게 다가오는 부분은 ‘글’이 아니라 ‘싶었다’이다. 나는 텍스트를 많이 다루는 일을 한다. 대부분 제안서, 보고서, 논문과 같은 형식의 글들을 쓴다. 이러한 작업도 따지고 보면 글을 쓰는 일이지만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은 아니다. 글을 쓰는 것 말고도 나의 시간은 대부분 해야 하는 일들에 쓰인다. 할 일들을 잊지 않고 처리하기 위해 쓰는 구글 태스크 앱에는 오늘까지, 내일까지, 이번 주까지 해야 할 일들이 빼곡히 적혀있다. 할 일 목록은 자가증식이라도 하듯 지워도 지워도 늘어날 뿐 줄어드는 일이 잘 없다. 그럼에도 나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고 불평하는 일도, 할 일들을 제쳐놓고 딴청을 피우는 일도 없다. 갑자기 무언가 이유 없이 하고 싶어지는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득 글이 쓰고 싶어진 것이다. 해외여행을 가고 싶은 것도, 영화를 보고 싶은 것도 아닌 왜 하필 글이었을까. 두 달 전쯤, 시간이 날 때 찾는 사설 도서관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고 있었다. 십여 년 전에 읽었던 책인데 그날따라 이 책에 다시 손이 갔다. 나는 하루키의 책을 좋아한다. 하루키 특유의 질감이 느껴지는 문장들을 읽으면 마치 강가에 앉아 하염없이 흘러가는 강물을 보듯 마음이 편안해진다. 책을 빨리 읽고 결말을 알고 싶지도, 그래서 글쓴이가 남기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파악할 마음도 들지 않는다. 언제 덮어도 그만인 책을 천천히 읽고 있으면 그게 내 마음을 놓이게 한다.


그날도 의자에 온몸의 무게를 의지한 채 하루키의 책을 읽고 있었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서는 주인공 쓰쿠루가 아카(赤), 아오(靑), 구로(黑), 시로(白)라는 이름을 가진 네 명의 친구들과 나고야에서 마치 하나로 연결된 것처럼 서로에게 의지하며 고등학생 시절을 보낸다. 그러다 쓰쿠루만 철도역을 짓는 꿈을 위해 홀로 도쿄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하게 되고 그 뒤 알 수 없는 이유로 다른 네 명의 친구들로부터 뜯겨 나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연락이 끊기고 십몇 년이 지난 삼십 대 중반에 쓰쿠루는 과거에 남겨진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다시 옛 친구들을 찾아가게 된다.


누구나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에 빠지기 마련이다. 쓰쿠루 역시 친구들과 달리 자신만의 색채가 없는 것을 괴로워했다. 그리고 나 역시 이 책을 읽으며 내가 가진 색채가 무엇인지 조금씩 고민하기 시작했다. 항상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하는 일들을 하고, 특별히 기억되지 않는 하루를 보내는 것이 괜찮은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단어를 찾자면 공허함이 찾아왔다. 재작년에 읽은 <모순>의 주인공 안진진의 표현을 빌리자면 삶이 납작하게 느껴졌다.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 없는 도서관에서 혼자 골똘히 앉아 있었다.


그렇게 책을 읽다 생각을 하다를 어정쩡하게 반복하던 중에 눈이 책한 곳에 머물렀다. 주인공의 이름 쓰쿠루가 짓다(作)의 의미를 갖는다는 내용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철도역을 보는 것을 좋아했던 쓰쿠루가 철도역을 짓는 것은 어쩌면 그가 가진 색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짓는다’는 표현이 새삼 특별하게 다가왔다. 집을 만들 때도 글을 쓸 때도 짓는다고 표현할 수 있는데 그 어원을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단어의 뜻이 좋았다. 나도 무언가를 짓고 싶었고, 그게 결국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어졌다.


글짓기의 즐거움은 수공예가 주는 만족감과 같다. 시작부터 끝까지, 아주 작은 디테일까지 작가의 손에서 만들어진다. 누구에게 의지할 필요도 누구를 탓할 일도 없다. 전부 내가 만든 것이고 그래서 못난 글도 소중하다. 이제는 컴퓨터 앞에서 밤새 3D 모델링 프로그램과 씨름하며 디자인을 짓는 일이 사라진 나에게 글이 그 즐거움을 주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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