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기억
기억에 남는 삶
파트릭 모디아노를 읽었을 무렵 나는 일종의 안정기에 접어들어 있었다. 절박한 마음으로 읽고 쓰는 여정을 시작한 지 5년이 되던 해였다. 독서는 나른했고 나의 문장들은 좀 먹고 있었다. 무엇보다 더 이상 숨이 차지 않았다. 한때 구원이었고 도피처였던 읽고 쓰는 시간이 어느덧 무풍지대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살다 보면 운명 같은 느낌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내가 파트릭 모디아노를 읽었을 때가 그랬다. 기억을 잃은 사람의 사투가 내 인생으로 침범하지 않길 간절히 기도했다. 무슨 일이 생겨도 그런 삶은 살고 싶지 않았다. 책을 덮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다짐했다. 이제는 더 이상 주저하지 말고 기억에 남는 삶을 살겠노라고. 기억할 수 있음을, 이제라도 기억에 남는 삶을 살 수 있음을 신께 감사하면서 말이다.
기억을 잃은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과거의 나’를 잊으면 ‘지금의 나’는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게 아니다. 기억은 정체성의 중추를 이룬다. 나는 읽고 쓰면서 잃어버린 나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나의 정체성을 뒤늦게 발견했다고 믿었다. 실제로 그랬다. 그러나 나는 무뎌져가고 있었고, 온실 속 따스함에 자족하며 절박했던 시절을 잊어가고 있었다. 읽고 쓰면서 나를 찾았고, 또 읽고 쓰면서 나를 잃어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 깨달았다. 그 무엇이든 숨이 차지 않으면 늪이 된다는 것을. 설사 그것이 구원이라 할지라도 안주하기 시작하면 점점 지옥으로 변한다는 것을.
정신을 차리고 나는 왜 읽고 쓰는가에 대해 생각했다. 살아있음을 느낄 수 없다면 읽고 쓰는 행위도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음을 알아차린 직후였던 탓인지 나는 그리 어렵지 않게 답을 낼 수 있었다. 기억에 남는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라고 말이다.
우스갯소리로 나는 늘 말하곤 한다. 누군가는 기록해야 하지 않겠냐고. 누군가는 이 순간을 남겨야 하지 않겠냐고. 기록하지 않으면, 즉 쓰지 않으면 사라지고 만다. 자명한 사실이다. 나는 두 눈을 멀쩡히 뜬 채 그토록 소중한 것들이 손가락에 모래가 빠져나가듯 사라지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인생의 절반을 허투루 흘려보낸 사람의 눈에는 보이는 게 다른 법이다. 나는 바로 그 한 사람, 기록하고 쓰는 한 사람이 되겠노라고 다짐했었다. 그러자 읽고 쓰는 일에 다시 절박해졌다. 맨 처음에 느꼈던 절박함과는 다른 절박함이었다. 해방감의 늪에 잠겨 나태해지지 않도록 늘 나 자신을 다독여야 한다는 새로운 과업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 과업은 어느 정도 숨이 찬 일상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심장이 계속 뛰게 만드는 일이었다. 자발적인 결핍, 자발적인 불편함을 성실하게 감수하여야만 얻을 수 있는 열매였다. 안주하지 않고 늘 길 위에 서 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복이었다.
기록하고 쓰는 것은 기억하는 것이다. 기억하는 것은 살아있는 것이다. 쓰는 것, 기억하는 것, 그리고 살아있는 것. 이 세 가지가 하나가 되어버린 나에게 읽고 쓰는 것은 더 이상 도피처의 의미만을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삶 자체다. 일상이다. 따로 계획하지 않아도 당연히 하게 되는 행위들이다.
읽고 쓰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는 말은 자칫 오해의 소지가 있다. 읽고 쓰는 일이 좋아졌다고 해서, 혹은 매일 읽고 쓴다고 해서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는 말이다. 일상의 의미를 너무 낭만적으로 보기 때문에 생기는 오류라고도 할 수 있겠다. 알다시피 일상은 언제나 핑크빛이 아니다. 대부분의 일상은 기쁨이나 슬픔 같은 어떤 특정한 감정을 느끼는 순간들보다는 자칫 무감각해지기 쉬운 순간들로 도배된다. 그래서 우리는 일상을 느끼거나 누리기보다는 허투루 흘려보낸다. 잠시라도 깨어 있지 않으면 우린 우리의 일상을 금세 무채색의 시간들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무채색의 일상은 무풍지대가 된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그곳은 죽음의 땅이다. 살아 있어도 살아 있지 않은 상태로 존재하게 되는 공간이다. 읽고 쓰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무채색의 시간과 죽음의 공간에 스며든다. 스며들어 생기를 불어넣고 원래 가지고 있던 일상의 고유한 색을 드러낸다. 그렇다. 읽고 쓰는 것은 잠자고 있던 혹은 죽어 있던 무채색의 일상을 깨우고 살려내어 원래의 색을 찾고 발현하게 만든다. 무풍지대가 되어버린 일상에 바람을 불어넣는 것이다. 그러므로 읽고 쓰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는 말은 무풍지대를 살아가는 게 아니라 마침내 깨어난 일상을 살아내게 되었다는 말이다. 매일 부활의 순간들을 살아내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는 곧 기억에 남는 삶을 살아내게 되었다는 말과 같다.
사랑하는 일이 편해지면 안 된다. 읽고 쓰는 일이 편해지면 안 된다. 편해지면 나태해진다. 나태해지면 살아있다고 할 수 없고 나태한 자의 성실은 기계적이고 수동적인 반복일 뿐이다. 읽고 쓰는 일이 그러한 반복이 되어선 안 된다. 반드시 숨이 차야 한다. 매 순간 심장이 뛴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사랑하는 일이, 읽고 쓰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편하기만 한 삶은 기억에 남지 않는다. 읽고 쓰는 삶이 편하다면 그 삶 또한 기억에 남지 않을 것이다. 적당히 불편한 삶을 지향하고 유지하는 것. 나는 이런 삶의 자세를 지혜라고 부르고 싶다. 나는 오늘도 점검한다. 읽고 쓰는 삶에 배가 불러 허리춤에 비곗덩어리가 끼는 삶을 살고 있는지, 아니면 아직도 배가 고픈지. 읽고 쓰는 것은 늘 도전이고 그래야 한다. 이것이 기억에 남는 삶을 사는 나의 비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