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돌책 깨기
장편소설(500페이지 이상이라고 하자)을 유의미하게 읽어내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세 시간 정도는 한 자리에 앉아 집중해서 빠져드는 과정이 필수인 것 같다. 물론 어디까지나 내 경험에서 도출된 결론이므로 일반화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7-8시간의 잠도 30분씩 혹은 1시간씩 끊어 자면 휴식의 효과보다는 피로를 더 느끼듯, 500페이지가 넘는 장편소설을 한 번에 50페이지 미만으로 계속 끊어서 띄엄띄엄 읽게 되면 줄거리 파악은 물론 몰입할 수 없어서 완독 가능성은 멀어지기만 하고 금방 포기하고 싶어진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이런 거 해서 뭣하나 하는 합리화도 머릿속에서는 활발하게 진행될 것이다. 문제는 이런 경험을 두세 차례 이상 하게 되면 장편소설이란 산은 점점 더 높이지고 내가 정복할 수 없다는 생각이 팽배해지게 된다는 점이다. 아마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에도 이미 벽돌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장편소설은 결코 읽을 수 없는 것이라는 선입견에 빠져 계신 분들도 많으리라 생각한다. 책을 사랑하고 장편소설을 특히 사랑하는 나로서는 아쉬울 뿐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두세 시간, 아니 적어도 한 시간 이상은 진득하게 앉아 일상에서 하던 온갖 잡념들을 내려두고 책 속으로 빠져들 줄 알아야 한다. 이건 집중력도 필요하지만, 어지간한 집중력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물리적인 시간과 여유를 확보하지 못하면 집중력이 없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장편소설의 완독은 힘들다. 나 역시 평일에는 하루에 독서하는 시간이 다 합쳐서, 즉 끊어진 시간을 합쳐서 한 시간 (많아야 두 시간, 만약 글 쓰는 시간을 포기한다면) 정도밖에 나지 않기 때문에 장편소설은 주로 한가한 주말 (즉 일정이 없는 주말) 혹은 휴가 기간에 읽는다. 그렇지 않으면 읽었던 부분을 읽고 또 읽고 하며 기억을 되살리는 작업만 하다가 결국 책을 덮게 되기 때문이다.
호기롭게 이렇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집중만 하고 애정만 있으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그래서 하루에 30분 정도 연이어 독서를 할 수 있는 평일에 장편을 소화하기 위해 참 많이도 시도했었다. 모두가 실패로 끝나 버렸지만 말이다. 밥 벌어먹어야 하는 직장 일도 전문적인 일이라 머리와 몸을 집중해서 사용해야 하고, 가정환경 상 내가 집안일과 육아도 한국의 여느 집들보다는 많이 담당해야 했으므로 집중력이 좋다고 믿었던 나조차도 평일에 장편소설을 읽어내는 것은 힘들었던, 아니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래서 주위에 벽돌책을 자주 읽어내는 사람들을 보면 이제 나는 안다. 아, 저 사람은 하루에 독서에 투자할 수 있는 물리적인 시간이 나보다 많구나. 나처럼 전문적인 직업에 매이지 않은 사람들, 이를테면 프리랜서나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사람들 혹은 월급을 받지 않아도 살 만한 경제력이 뒷받침되는 사람들 등이 책을 좋아하게 되면 벽돌책 깨기가 용이한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벽돌책 깨기에 필요한 건 집중력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물리적인 시간과 마음의 여유다. 내가 지금 간절히 원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 가지 제안하고 싶은 게 있다. 물리적인 시간이 확보되는 분들은 꼭 장편소설 읽기를 도전해 보시라고. 남아도는 시간에 책만 읽으면 너무 아깝지 않나요?라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일단 한 번 시도해 보라고 나는 강력하게 말하고 싶다. 분명히 아깝지 않을 것이다. 잘했다고 스스로 만족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기록될지도 모른다. 그 책이 인생책이라고 고백하게 되는 경우도 생길지 모른다. 독서가 좋아질지도 모른다. 앞으로 책을 계속 읽게 되는 사람으로 거듭날지도 모른다. 그러니 꼭 시도해 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