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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추방시키는 용기

줌파 라히리 저,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를 읽고

by 김영웅

스스로를 추방시키는 용기


줌파 라히리 저,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를 읽고


제2의 모국어이자 주언어였던 영어로부터 스스로를 추방시키고 이탈리아어를 제3의 모국어이자 제2의 주언어로 사용하기 시작한 줌파 라히리는 퓰리처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저명한 미국 작가다. 그녀는 인도 벵골 출신 부모 밑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미국으로 이주하여 이민자 신분으로 살게 되었고, 어릴 적엔 부모를 따라 벵골어를 사용하다가 미국 이주 후 영어를 사용하게 되며 이중 정체성을 평생 가지고 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탈리아어가 느닷없이 그녀의 삶으로 들어와 중심부에 자리를 차지해 버렸다.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탈리아, 그리고 그곳의 언어를 흡수하고 싶었던 그녀는 미국 작가로 전성기를 누리던 2012년 돌연 이탈리아로 이주하는 결정을 내리고 실행에 옮긴다. 로마에서 2년을 거주하며 이탈리아어로 말하고 읽고 생각하고 쓰는 사람이 되었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그녀는 이탈리아어로 글을 쓰는 걸 놓지 않는다. 그녀는 왜 이런 무모하게 보이는 행동을 했던 걸까? 세계적인 작가로 성공하여 명성을 떨치며 계속 승승장구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그런 선택을 했던 걸까?


이 책은 이 질문에 대해 그녀가 이탈리아어로 쓴 답이다. 그녀는 말한다. 이탈리아어로 글을 쓰는 것은 일종의 도주라고 생각한다고. 철저히 언어적 변신을 꾀하며 무언가에서 멀어져 자유로워지고자 노력하는 거라고. 영어에 대한 패배감이나 성공에서 도망치는 거라고. 그러면서도 그녀는 여전히 어색한 구석이 남아 있음을 고백한다. 구시대 우아한 긴치마에 티셔츠를 입고 밀짚모자를 쓰고 슬리퍼를 신은 것처럼 이상하게 옷을 입은 느낌, 혹은 엄마의 옷장에 몰래 들어가 하이힐을 신어보고,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보석과 모피코트를 걸쳐보려는 어린아이 같은 느낌과 비슷하다고.


그녀는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평생 짊어진 사람이었다.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해도 인도계 외모 때문에 미국에서도 외국인 취급을 받았고, 이탈리아 로마에 2년간 거주할 때 이탈리아어를 남편보다 더 유창하게 구사했음에도 이탈리아 현지인들로부터는 이탈리아인과 비슷한 외모를 가진 남편보다 더 이탈리아어를 못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어딜 가나 현지인으로 인정받지 못한 채 평생을 이방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이탈리아어를 흡수하기로 했던 선택도 어쩌면 이런 정체성 혼란이 없었다면 오히려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성공과 정착이 가져다주는 안정감에 잠식되지 않고 창작에 대한 순수한 작가의 마음을 간직하기 위해 모험을 용기 있게 선택한 줌파 라히리의 작품이 궁금해졌다. 스스로를 추방시키는 용기에서 나는 무언가를 배울 수 있을 것 같은 기대로 가득 차게 된다. 그녀의 작품들을 여러 권 구입했다. 전작 읽기 작가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다.


#마음산책

#김영웅의책과일상


* 줌파 라히리 읽기

1.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https://rtmodel.tistory.com/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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