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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재의 편재

크리스티앙 보뱅 저, '빈 자리'를 읽고

by 김영웅

부재의 편재


크리스티앙 보뱅 저, '빈 자리'를 읽고


보뱅의 글을 읽고 있으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어두운 곳에 가느다란 한 줄기 빛이 비칠 때야 비로소 드러나는 먼지처럼, 보뱅의 글은 평소에 모르고 지나치던 모든 존재들을 세밀하게 비춘다. 먼저 나를 멈추게 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러지 않기로, 그러지 말자고 연신 다짐해 놓고도, 또다시 쫓기듯 살던 나는 그제야 쫓기는 나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걸음을 멈추게 되고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한다. 시간도 멈추고 모든 것이 제자리에 놓인 응시의 시공간이 열리는 순간이다. 그곳에서 나는 경건한 자가 되어 다소곳한 자세로 내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을 응시한다. 그리고 나를 포함하여 모든 존재들 가운데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부재' 혹은 '결핍'을 보게 된다. '빈 자리'다. 신이 떠난 자리일까, 그 텅 빈 시공간은 누구의 빈 자리인 걸까. 아무것도 아닌 듯하나 모든 존재의 중심에 놓인 이것, 이 공허를 인지하는 것, 이 빈 자리를 깨닫는 것이 보뱅의 글을 위한 독법이리라.


줄거리를 요약할 수 있는 소설도 아니고, 어떤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는 사상이나 주장이 담긴 글도 아니다. 보뱅의 글은 어쩌면 '빈 자리'를 노래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응시하며, 그 가운데 있는 부재와 결핍을 따스한 눈으로 지긋이 바라보며 그것들과 함께 한다. 편재한 부재의 미학이랄까. 부재의 충만이 만들어내는 향연이랄까. 보뱅의 글을 읽고 있으면 겸손해진다. 앞과 위만을 쳐다보며 살던 나 자신의 삶을 반성하게 된다. 존재를 증명하는 부재, 이 부재를 알아채기 위해서는 먼저 존재를 가만히 응시할 줄 알아야 한다. 존재 안의 부재를, 그리고 그 부재를 통해 존재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존재에 선행하는 부재, 어쩌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들의 존재론적 한계일 것이다.


정갈한 문장이 읽고 싶을 때 보뱅을 꺼내든다. 읽다가 자주 멈추게 되는 그의 글을 사랑한다. 중요한 것과 의미 있는 것, 아름다운 것과 기억에 남는 것의 경계가 흐려질 때 나는 다시 이 책을 손에 들 것 같다.


#1984BOOKS

#김영웅의책과일상


* 크리스티앙 보뱅 읽기

1. 작은 파티 드레스: https://rtmodel.tistory.com/1437

2. 그리움의 정원에서: https://rtmodel.tistory.com/1446

3. 환희의 인간: https://rtmodel.tistory.com/1449

4. 빈 자리: https://rtmodel.tistory.com/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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