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누적
나이 들며 좋은 점 한 가지는 사람을 볼 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보이던 것들이 보이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달라진 게 아니라 그 사람을 바라보는 내 눈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눈이 달라졌다는 건 내 생각과 마음이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보이지 않다가 보이는 것 한 가지는 시간의 누적이다. 한 사람 내부로 흐르는 시간은 절대 뒤로 사라지지 않는다. 가느다란 폭포가 되어 아래로 아래로 쌓이고 또 쌓인다. 시간은 앞에서 뒤로 수평으로 흐르지 않고, 위에서 아래로 수직으로 흐른다. 한 사람을 통과한 시간은 그 사람이 머물던 공간과 그 사람의 생각과 마음과 서로 엉기며 하나가 된다. 그렇게 고유한 색을 띠면서 내면 깊숙한 곳에 쌓인다. 과거의 기억을 잊는 것을 망각이라 한다. 우린 자주 망각한다. 하지만 망각은 잊힘이지 사라짐이 아니다. 사라지는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공간과 생각과 마음과 하나가 된 시간은 잊힐 순 있어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 깊은 시간의 우물을 볼 수 있다는 건 축복일까. 적어도 한 사람의 진정성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는 그런 것 같다. 피부를 뚫고 방사되는 그 무언의 힘. 머리를 거치지 않아도 알아챌 수밖에 없는 무게 없는 무게. 인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저 깊은 시간의 우물에서 길어 올린 침묵. 그 견딤의 시간들. 이런 것들이 느껴질 때면 나는 마음의 무릎을 꿇고 한없이 낮은 자가 되어 나 자신도 관조할 수 있게 된다. 깨달음의 순간이다. 드물게 찾아오는 겸손의 시간이다. 내 안에 흐르는 시간의 폭포 아래, 깊고 어두운 곳에 빛을 비추는 순간이다. 한 사람 내면의 시간의 누적은 그렇게 또 한 사람을 깨운다, 살린다, 구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