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과 운명
어릴 때부터 클래식을 좋아했다. 일주일 용돈 오백 원일 때에도 나는 깐도리나 바나나맛바 혹은 짱구나 새우깡을 사 먹지 않고 모으고 모아 헌책방에 가서 애거서 크리스티의 빨간색 표지의 추리소설을 사거나 (당시 중고책 한 권에 오백 원 정도였다), 좀 더 돈을 모아 노란색 커버의 클래식 카세트테이프를 샀다. 원하던 무엇인가를 감내하고 마침내 구한 것은 그냥 돈 주고 산 것보다 더 귀하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내게 추리소설과 클래식 테이프는 보물과도 같았다.
아내와 아이가 미국으로 가고 나서부터 적적한 집에서 나는 KBS 클래식 FM을 즐겨 듣는다. 클래식을 좋아해서이기도 하지만, 디지털이 아닌 아날로그 감성을 어떻게든 유지하고픈 나의 절박한 몸부림이기도 하다. 요즘은 너무나도 쉽게 숏폼 같은 동영상에 정신을 팔리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뭔가를 능동적으로 하지 않으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런 문화에 휩쓸려가게 된다.
아내의 목소리 이외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매력적이라고 느껴본 적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밤 10시부터 12시, KBS 클래식 FM에서는 ’당신의 밤과 음악’을 방송한다. 아나운서 이상협의 목소리가 어느 날 내 귀에 꽂혔다. 사실 이 라디오 채널을 고정시켜 놓고 매일 듣게 된 가장 주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매력적인 목소리로 소개되는 음악과 글귀들이라 그런지 나는 시간이 허락만 한다면 가능한 귀를 쫑긋 세우고 방송을 들으려고 노력한다.
10시 40분에서 11시 사이에 이상협 아나운서는 어떤 책에서 가져온 글을 읽어주기도 하고, 작은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는데, 그때 배경음악으로 깔리는 음악이 또 내 귀를 굴복시켜 버린 것이다. 찾고 찾아서 마침내 찾아냈다. Max Richter였다. Sleep 앨범의 Dream 13 (minus even).
오늘 한 시간이 넘도록 무한반복해서 듣고 있다. 감성도 돋게 만들뿐더러 아득한 기억과 깊은 사유로 나를 이끄는 힘이 있다. 피아노와 첼로와 바이올린의 선율. 이 아날로그는 여전히 힘이 있고 나에게 영감을 준다. 우연이 가져온 운명적인 만남. 역시 인생의 진정한 감독은 우연인 걸까?
https://youtube.com/watch?v=4dFBur7Gihg&si=HEMeLA3OUpzspDK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