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의 무게

by 김영웅

그리움의 무게


그리움은 두 층위를 가진다. 하나는 짧지만 강렬했던 순간들에 대한 그리움, 다른 하나는 일상 속에서 한 몸이 되어버린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다. 전자의 대상이 비일상이라면, 후자는 지극한 일상이다. 전자가 일상을 탈피한 것에 대해서라면, 후자는 일상을 상실한 것에 대해서다. 어제 읽고 감상문을 남겼던 바움가트너의 경우는 후자에 해당된다. 그리고 나는 후자의 그리움이야말로 진정한 그리움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비해 전자의 그리움은 깃털처럼 가볍다고 느낀다.


전자의 그리움은 엄밀한 의미에서 그리움이라 할 수 없다는 생각도 한다. 일탈은 그리움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에게 그리움이란 단어는 무게를 갖는다. 그리고 그 무게는 상실에서 비롯된다. 소중한 것을 잃었다는 것 자체가 갖는 무게, 그것을 기억하며 그것이 없어진 현재를 살아내는 자의 삶의 무게, 시공을 관통하는 애잔함 모두가 무게를 갖는다. 이런 관점에서 전자는 그리움에 해당되지 못한다는, 아니 해당될 수 없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말초적인 쾌락에 가깝고 일상을 탈피했다는 찰나의 바람과도 같은 순간들에 불과하기 때문에 나는 전자를 그리움이라고 정의하기에는 한없는 가벼움을 느끼는 것이다.


바움가트너의 그리움은 환지통으로 압축된다. 전자의 그리움은 환지통을 가져오지 않는다. 한 번도 일상이 된 적이 없는, 다시 말해 한 번도 내 몸의 일부가 된 적이 없는 그 무엇을 상실할 수는 없는 법이다. 상실이 배제된 그리움은 공허한 허상에 가깝다. 그리고 그 허상은 대상을 잘 알지도 못한 채 혼자 상상(이라 쓰고 망상이라 읽는다)한 결과물일 확률이 높다. 대상 그 자체가 아닌 스스로 만들어낸 환상이라는 말이다.


이는 단기 관광객과 거주민이 바라보는 공간의 의미가 다른 이유와 같다. 그곳에 오래 거주한 사람은 그곳을 떠났을 때 향수를 느낄 수 있어도, 그곳에 잠시 방문한 사람은 그곳으로부터 아무리 좋은 인상을 받았더라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향수를 느낄 수는 없는 것이다. 그건 향수라기보다는 낯섦에 대한 기분 좋은 체험 혹은 동경이라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여전히 쾌락에 불과하다.


하지만 기억이라는 개념을 가져올 때 해석은 달라진다. 주지하다시피 기억은 이상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찰나의 순간도, 무의미로 인식된 사소한 것들도 때론 기억의 중추를 담당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를 가미한다면 전자의 경우도 충분히 그리움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공감할 수 있는 그리움은 후자에서 비롯된다. 인생의 무게랄까, 상실의 무게랄까. 잃어버린 모든 것들은 무게를 갖는 법이므로. 그것이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더욱더 그러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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