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외로움

by 김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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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외로움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자는 외로울 수밖에 없다는 숙명적인 결론에 다다른다. 그런 강을 건넌 자는 언제나 소수다. 사실 그들 역시 왜 자신이 그 소수에 속해 있는지 모른다. 스스로 획득한 능력이라기보다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경우가 일반적일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은 강을 건너지 않은 채로 살아간다. 이들 역시 한 부류가 아니다. 세 부류가 있는 것 같다.


첫 번째 부류는 그 강을 건너고 싶으나 용기나 여러 가지 놓치기 싫은 것들이 있다는 이유로 언제나 강 바로 앞에서 망설이며 건너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두 번째 부류는 그 강을 건너지 않기로 작정한 뒤 강을 등지고 자신만의 매트릭스에 갇힌 채 강을 건너려고 하는 사람들을 핍박하거나 비난하기 시작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강을 건너면 큰일 난다거나 잘못될 거라고 스스로 선지자 노릇을 한다. 강을 건넌 사람들을 악마화시키기도 한다. 급기야 강의 존재까지 없는 걸로 만들어 버린다. 내가 가장 만나기 두려워하는 부류다.


이 두 부류보다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세 번째 부류가 있다. 이들은 강의 존재조차 평생 모른 채 살아가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이다. 앞에서 언급한 두 번째 부류의 기만적인 말들에 순응하고 그것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그 너머를 궁금해하지도 않으며 자신의 조그만 우물을 가꾸고 지키며 자족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런 자족의 정체는 다수에 속해 있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들에겐 다수와 익명성이 곧 안정감이다. 나는 이런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사회가 섬뜩하게 느껴진다. 이 세 번째 부류는 평소에는 착한 모습, 선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첨예한 정치적인 상황이 발생할 때 이들은 전적으로 사적인 이익에 따라 움직인다. 물론 이 흐름을 유도하는 부류는 앞에서 말한 두 번째 부류다. 즉 세 번째 부류는 두 번째 부류의 잠재적인 정신적 노예인 것이다.


첫 번째 부류와 소통하는 건 답답하지만 어렵지 않다. 적어도 지적이고 이성적으로는 대화가 가능하다. 이들은 실천하지 못하는 자신들의 처지를 스스로 알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강 건넌 사람들을 향한 손가락질은 적어도 하지 않는다. 반지성적의 물결에 휩쓸려가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두 번째 부류와의 소통은 결코 쉽지 않다. 아니,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게 솔직할 수도 있겠다. 이성적인 대화 자체가 성사되지 않는다. 이들이 종교인일 경우, 갑자기 너그러운 어른이 되어 강 건넌 사람들을 마치 돌아올 탕자처럼 여기며 그들을 위해 기도한답시고 위선을 떨기도 하는데, 이런 상황이 내가 가장 혐오스러워하는 상황이다. 한 번 맛보면 타격감이 커서 트라우마가 된다.


세 번째 부류와의 소통은 강 건넌 사람들이 현실에서 가장 많이 마주해야 하는 경우다. 나는 여전히 여기에 서툴다. 이들의 천진함(?)이 평상시엔 사람 좋은 모습으로 발현하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는 상황에서는 진짜 아무 문제없는 것처럼 지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이념적인, 사상적인, 혹은 종교적인 문제가 발생하기만 하면 곧바로 달라진다. 관계는 단절되거나 서먹해진다. 나는 이런 상황을 너무나도 많이 겪었다.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과도 같다. 지긋지긋한 이 무한반복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답을 알지 못한다. 그저 외로울 뿐이다. 이렇게 글로 푸념을 늘어놓고 나와 비슷한 소수의 강 건넌 사람들과의 소통을 통해 위로와 공감을 받으며 또 하루를 넘기며 감정이 사그라들기를 기다릴 뿐이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세 번째 부류와의 소통이 회복되지는 않는다. 날씨 얘기 정도를 할 수 있는 관계가 되는 건 이젠 별문제 없이 해낼 수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진정한 소통은 불가능하다.


진정한 소통이 가능한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그런 이들과의 공동체 안에 속하고 싶다. 언제나 갈증이 있다. 그리고 이 갈증이 언제나 다수에 속하지 못한 자의 말 못 할 죄책감 비슷한 감정과 항상 같이 존재하기 때문에 두 배로 힘들다. 차라리 나도 강의 존재를 몰랐더라면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나도 저렇게 순진하게 웃으며 의미도 모른 채로 뻔하고 상투적인 관용어구를 사용하며 우아하게 아무 문제없는 척하며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하지만 강을 건넜기 때문에 얻은 유익들을 열거하자면 너무나도 많아서 수십 장의 글을 써도 다 써놓지 못할 것이다. 나에게 강을 건너기 직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 타임머신이 주어진다 해도 나는 또다시 강을 건널 것이다. 진리를 모르는 바보로 죽고 싶진 않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로 생을 마감하고 싶진 않다. 그렇다고 인생무상을 외치는 세상에 찌든 어른으로 죽고 싶지도 않다. 아이의 눈을 간직한 어른, 눈이 깊은 사람, 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 언제나 불안을 넘어 경이의 눈으로 고유한 존재를 알아채고 그 안에서 진정한 소통을 하는 사람이고 싶다.


아, 이렇게 일필휘지로 써놓고 보니 나는 외로운 건 어쩔 수 없겠구나 싶다. 숙명이라 생각하고 즐기자. 아자. 다만, 한 단어만 더 쓰자. 그냥 외로움이 아닌 '슬기로운 외로움'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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