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성장을 원한다면
“새는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저 유명한 문장은 헤세의 '데미안'에 등장한다. 데미안을 제대로 읽어본 사람보다 왠지 저 문장을 들어본 사람이 더 많을 것 같은 느낌은 아마 현실일 것이다. 그만큼 널리 알려진 문장이다.
그런데 나는 저 문장이 조금 거슬린다. 내 눈에는 ’힘겹게‘와 ‘투쟁’이 중복으로 보이고, '깨뜨려야 한다'는 표현보다 '파괴'라는 확실한 단어를 사용하는 게 좋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저 번역문보다 다음 번역문을 좋아한다. 사실 내가 중학생 때 처음 읽었던 ‘데미안‘에서도 이 번역문이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우린 보통 저 문장을 이미 알 바깥의 세상에서 알을 깨고 나오는 아기 새를 바라보는 어미 새나 제삼자의 입장으로 우아하게 읽는다. 그 결과 저 문장을 성장이라는 키워드로, 즉 알을 깨고 나오는 행위를 교과서 식으로 자연스럽고 당연한 과정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별 다른 감흥도 없이 말이다.
그러나 저 문장은 그렇게 읽어서는 안 된다. 알을 깨뜨리고 나오는, 즉 자기가 몸 담고 있던 세계를 기꺼이 스스로의 힘으로, 주체적으로 파괴시키며,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새로운 세상으로 옮겨가는, 마치 새롭게 태어나는 것처럼 (실제론 알 속에서도 생명이었다. 부화는 탄생이 아니다. 유정란 속의 생명도 생명이다. 즉 태어나는 게 아니라 알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어린 새의 입장에서 치열하게 읽어야 한다.
자, 이제 다음 질문에 답을 해 보자.
"당신은 당신이 몸 담고 있던 한 세계를 파괴하고 나온 적이 있습니까?"
예상컨대 많은 사람들이 뒤통수를 맞은 듯한 기분을 느낄 것 같다. 성장을 위해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여기던 '파괴'라는 과정을 실제로 체험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선뜻 답하기가 망설여지기 때문일 것이다. 놀랍게도 대부분은 ”모른다“거나 ”없다“라고 대답하지 않을까. 적어도 솔직하다는 가정 하에서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 성장했다고 말한다. 원래 있던 세계를 파괴한 적도 없으면서 말이다. 어떤 이는 죽을 때까지 알 속에서 몸집만 키우는 경우에 해당될 테고, 또 어떤 이는 알을 다 부수지 않고 한쪽 발만 알 바깥에 내놓고 양쪽 세상을 아우르며 사는 경우에 해당되지 않을까 한다.
며칠간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자의 숙명과 비애에 대해 글을 썼다. 이 몸글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조금 정리가 되는 것 같다. 저 데미안에 나오는 문장 속 파괴라는 단어를 주체적으로 읽고, 파괴자로서 새로운 세상을 여는 한 생명의 입장에서 읽으니 말이다. 그래서 AI를 통해 그린 그림도 자유롭게 비상하는 새가 아닌 알을 파괴하는 모습에 강조점을 두었다.
나는 파괴자가 되어 본 적 없는 자들에게서 위선과 비겁함과 비열함의 냄새를 맡는다. 그들은 자신의 한계도 모르며, 파괴하지 않고 성장이 가능하다는, 마치 동그란 네모를 찾을 수 있다는 생각 속에서 살아간다. 그들의 실체가 무엇인 줄 아는가? 성장을 한 번도 제대로 경험한 적 없다는 것. 그러니 늘 눈치나 보며 다수와 익명성에 묻어가는 인생을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시 한번 묻는다.
”당신은 당신이 몸 담고 있던 한 세계를 파괴하고 나온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제안한다.
"기꺼이, 주체적으로 당신이 안전하다고 느꼈고 온 세상이라 믿었던 그 세계를 파괴하고 나오십시오!"
진정한 성장을 원한다면 말이다. 그러지 않으면 성장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