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과 망설임, 불완전성과 인간다움
김애란 작가와 손석희 아나운서의 짧은 대화 덕분에 침묵과 망설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인공지능에게는 없고 오직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무엇일까에 대해 평소에 ‘불완전성’이라고 대답하던 나의 입장과 맞닿아 있어 반갑기도 했다.
침묵과 망설임, 이 두 가지는 ‘유려하고 거침없는 언변’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불완전성에 해당된다. 발표자가 이런 행동을 하면 준비가 덜 되었다고 여겨지기 십상이다. 우린 막힘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감 있게 상대방을 압도시키는 것을 은연중 최고의 스피치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판단은 발화된 말의 권력을 상징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마치 권력자는 말하고 피권력자는 침묵하는 게 당연한 것처럼, 마치 갑은 머뭇거리지 않아도 되지만 을은 언제나 할 말을 마음껏 하지 못하고 망설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우린 발화되지 않은 말의 주체를 보통 열세에 속한 사람에게서 찾게 된다. 그런데 바로 그 열성적인 항목이 인간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되뇌어진 것이다. 우리도 모르게 종종 수치로 느끼고 감추고 싶거나 피하고 싶은 불완전한 모습들이 인간다움을 대변한다는 이 말은 역설 중 역설이지 않을까.
그러나 저 침묵과 망설임은 결코 문자적인 불완전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여백을 가진다. 어쩌면 이 여백 때문에 우리는 저 말에 멈춰 서서 생각하게 되는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여백은 완전성과 불완전성의 개념을 다시 하게 만든다. 두 개념 사이에 나 있던 명징했던 선이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인공지능은 여전히 모르는 듯하다. 앞으로도 알 길이 있을까 싶다. 인간의 매력에 대해서 말이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이성의 극대치를 재현하는 모델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지만, 결코 이성적이진 않다. 인간은 이성을 사용할 수 있을 뿐, 루틴 한 삶에서는 이성을 의지하지 않는다. 대신 습관을 의지한다. 습관이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행동하고 살아버리는 것의 실체다. 관성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다. 인간은 살아온 대로 사는 것이다.
이성이 가장 활발하게 움직일 때는 뭔가 일을 그르치거나 늘 해오던 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았을 때다. 습관대로, 관성에 이끌려 살던 방식이 먹히지 않을 때인 것이다. 대부분의 시간에서 인간은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인간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건 이성적인 접근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쉽게 이를 수 있다. 인간은 복잡하다. 굳이 하이데거를 데려오지 않아도 인간은 존재자 중 유일하게 존재에 대해 묻고 저 너머를 궁금해하는 존재자이지 않은가. 많은 것들에서 이율배반적인 양상을 띠는 게 인간 아닌가.
김애란 작가의 말에서 내가 멈춰 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아마 침묵과 망설임이라는 불완전성을 상징하는 두 단어가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더 큰 부분을 툭 하고 건드려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논리적으로는 반박하기 쉽지 않지만 불완전성이 인간의 고유한 매력의 중추일지도 모른다는 저 사실만은 머리를 거치지 않고 가슴으로 인정이 된다. 아마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들이 많으리라 생각한다.
도스토옙스키를 통해 나는 인간다움의 한 가지 속성인 이율배반성을 배웠다. 이 역시 불완전성과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는 속성에 해당될 것이다. 하지만 저 깊숙한 곳에서는 누구라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속성이기도 할 것이다. 이것이 도스토옙스키를 읽는, 읽어야 할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할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이성과 합리로 세워온 잣대들의 가벼움을 알게 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이건 이성이 틀렸다는 게 아니라 인간을 좀 더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기폭제라고 나는 해석한다 인공지능 덕분에 인간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이 역설이 한 편으론 반갑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