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앞에서, 사람 앞에서, 그리고 자신 앞에서

겸허할 이유

by 김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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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앞에서, 사람 앞에서, 그리고 자신 앞에서.


진리는 조각이 되어 허물 뿐인 세상의 파편들에 산재한다. 우리는 거울에 비추어 보듯 희미하게 우리 앞에 드러난 몇몇의 작은 조각들을 통해서 진리를 부분적으로 감지할 뿐이다. 그러니 마치 진리의 전부를 다 본 것처럼, 마치 진리에 통달한 것처럼 가르치려는 자는 조심해야만 한다. 성급한 일반화와 잘못된 확신에는 언제나 교만과 악이 깃드는 법이다. 심지어 그것이 광명의 천사로 나타날지라도.


이것이 우리가 겸허해야 하는, 아니 겸허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러나 우리 중 몇몇은, 특히 스스로 영리하다 지혜롭다 자부하던 이들은 이 명백한 사실 앞에 서서 당당히 거짓을 행했다. 이를테면 순서를 바꾸는 은밀한 작업을 진행한 것이다. 우연히 (필연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차후의 해석에 불과하다) 알게 된 진리의 한 부분을 알고 나서 마치 그것이 본인의 열심이나 능력의 열매인 것처럼 사후 위장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것이 비법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신의 과거 경험담을 전설로 만들어 상품화시킨다. 나는 이런 작자들의 행패가 구름같이 허다한 사람들이 진리에 다가서지 못하게 막는 커다란 장애물 역할을 한다고 본다. 그들이 마치 길잡이인 것처럼, 선구자인 것처럼 행세할지라도 말이다.


진리의 조각을 맛보는 경이로움은 결코 교만과 함께 할 수 없다. 진리는 내용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내용을 담고 있는 형식과의 긴밀한 연계에 방점이 있다 (기독교 용어를 빌려서 말하자면 성육신이다). 텍스트 안에 진리가 녹아 있지만, 텍스트를 가졌다고 해서 진리를 가진 게 아니며, 그 이면에 흐르는 콘텍스트와의 연계와 그것이 취하고 있는 스탠스를 재현하지 못한다면, 결코 진리를 맛보았다고 할 수 없다. 쉬운 예로, 진리를 깨달았다고 하면서 여전히 자기 자신만의 안위를 중요하게 여기고 이웃을 멸시하는 경우를 떠올리면 된다. 몸으로 번역되지 않는 진리의 깨달음은 비록 같은 텍스트에서 취한 것이라 할지라도 ‘나’라는 옷을 입고 있어서 그 속에 들은 진리는 그 안에 갇힌 채 바깥으로 드러나지 못한다. 오로지 드러나는 건 ‘나’이다. 잊지 말아야 한다. 외부에 노출되는 건 텍스트가 아닌 그 텍스트를 알거나 소지한 당신의 콘텍스트, 즉 삶이다.


진리의 맛을 본 자의 행동은 무거운 어깨를 지니기 마련이다. 책임감이랄까 빚진 자의 도리랄까. 텍스트를 넘어 콘텍스트를 향한다는 것의 가장 작은 단위는 바로 우리 자신, 나의 일상이다. 하잘것없어 보이는 우리의 일상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다.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일상의 의미를 알아채게 위해서다. 영적인 눈, 영적인 해석? 텍스트를 볼 게 아니라 주어진 일상을 살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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