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평온함을 위한 작은 실천
동등함: 진정한 평온함을 위한 작은 실천.
칠흑 같은 적막보다는 주위의 단조로운 소음이 자장가가 되어 잠을 부추기는 법이다. 평온함은 조용함이 아닌 익숙함에서 주어진다.
적응이란 놀라운 능력이지만, 아무 소리도 아무 냄새도 없는 텅 빈 공간은 예외다. 그것은 적응할 대상이 아니다. 종종 공포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적응은 대상이 필요하다. 적응하기 위해선 무언가 먼저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존재는 적응에 선행한다). 그 존재자에 길들여지고 그것들과 암묵적인 화해를 이루는 무의식적인 행위가 바로 적응이다. 익숙해짐이다.
혼자 있을 때 평온함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참고로, 이때 혼자라는 의미는 사람에 국한된다. 즉 ‘혼자’는 ‘타자의 부재’를 의미한다.) 주위의 자연이나 사물, 즉 현존재 (사람)가 아닌 존재자에게 적응하는 건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혼자 있을 때가 아닌 인간관계에서 평온함을 누리기 위해서는 서로에게 적응해야 한다. 익숙해져야 한다. 혼자 있을 때와는 달리 적응할 대상이 자연이나 사물이 아니라 자신과 동일한 인격체인 사람이기에 이때의 적응은 쌍방의 익숙해짐이다. 그래서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일방적인 관계보다 쌍방적인 관계가 복잡한 건 조금만 생각해도 이해할 수 있다. 반려동물과 함께 할 사람의 차이를 떠올리면 된다.
평온한 가정의 평온함은 평온함 자체보다는 그것이 얻어진 방식이 더 중요할 수 있다. 평온함의 진위여부를 가리는 데에 초석이 될 수도 있고 그것의 유효기간이라든지 신뢰도를 측정할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부장적인 체제가 언제나 불협화음을 생산해내지는 않는다. 많은 경우 암묵적 묵인을 통한 그릇된 익숙해짐으로 인해 나름의 평온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의 평온함은 유리그릇 같아서 언제든 깨질 수 있기에 위태롭고 유한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한 꺼풀만 벗겨내면 억압과 굴욕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가리고 있는 평온함은 결코 진정한 평온함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동등한 인격적인 관계는 현존재인 사람에게만 허락된 축복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린 그것을 너무나 악용, 오용해왔다. 혐오, 차별, 배제 기작을 통해 나와 동등한 인격체인 타자를 자연이나 사물로 격하시키고 그 상태를 힘으로 유지시키면서 자신도 타자도 그 거짓된 평온함에 익숙해지게 만들었다.
진정한 평온함. 나는 이것이 모든 사람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평화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이기 이전에 우린 인간이다. 그러므로 이 추구는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상식이라는 말이 된다.
멀리 볼 것 없다. 지금 내가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을 나는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점검하면 좋겠다. 크게 볼 필요 없다. 나의 작은 실천이면 족하다. 평등, 존중, 배려. 자기도 모르게 익숙해져 있는 거짓된 평온함이 있다면 새해를 맞이하여 갱신하는 한 해가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