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려있음, 해석의 영역

인식의 개혁

by 김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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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의 개혁: 열려있음, 해석의 영역.


우주의 중심에 있지 않다고 해서 지구가 가진 특별한 의미가 상실되지 않는다. 이제는 상식이 되었다시피 지구는 태양계라는 공간에서 태양 주위를 도는 많은 행성 중 하나다. 천동설은 잘못된 확신과 신념이 종교와 만나 만들어진 허상이었다. 실상은 지동설이었다. 천동설을 과학으로 알고 그 과학이 자신의 신앙을 견고하게 해 준다고 믿었던 사람들은 지동설이라는 실상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과학은 신앙의 근간까지 흔들어 버리는 이단과 같은 존재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강력했던 종교의 힘도 시간이 지나면서 무력화되었다. 나는 과학이 가진 고유한 자정작용이 이런 결과를 내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많은 시간이 흐른 후 기독교는 공식적으로 지동설이 옳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해야 했고, 외롭고 처절하게 지동설을 주장했던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오는 지금은 이단이 아닌 선구적인 과학자로 자리매김했다.


상상이지만, 천동설이 기정 사실화되어 있을 당시 지동설이 제기되었을 때, 아마도 허상인 천동설을 실상으로 만들기 위한 많은 과학자들의 노력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과학자라는 직업이 명확하게 구분된 시대가 아니었지만, 천동설을 지키기 위한 작업은 아마도 저명하거나 권위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진행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말하자면, 유사과학이다.


진리의 조각은 허상을 실상처럼 둔갑시켜주는 유용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조각은 조각일 뿐, 자신들의 신념을 설명해 줄 수 있다고 해석된 조각에만 의지하고, 그와 반대되는 다른 조각들은 무시하거나 마치 잘못된 것처럼 누명을 씌우는 행위는 결국 진리를 가리게 되는 역효과를 낳는 법이다. 증거를 ‘선택’하는 행위는 과학계에서는 금기시된다. 과학은 언제나 ‘선택되지 않은’ 증거들에 기반하여 도출되는 가장 합리적인 설명이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억지와 거짓으로 도배된 그 행위의 민낯은 이 시대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동설이 천동설을 이겼다고 표현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둘은 겨룰 만한 상대가 애초부터 아니었기 때문이다. 과학과 유사과학은 같은 선상에 있지 않다. 유사과학은 과학이 아니다. 무속과 거짓 신념에 의거한 미신일 뿐이다. 그러므로, 만약 개인의 신앙이 이런 미신에 기반을 두고 있다면 과연 그 신앙이 참된 신앙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 아마도 대부분은 그 신앙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가져다준 어떤 유익 때문에 함부로 재고할 용기를 내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이런 미신에 기반한 신앙에 천착한 사람들은 대부분 신앙을 지킨다거나 신을 수호한다거나 하는 거창한 이유를 들면서도 정작 스스로는 자신들이 그동안 문제없이 유익을 취했던 그 거짓된 평화를 지키고 싶어서 결국 거짓의 수호자 내지는 대변자가 되기로 결단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주는 것 중 하나는 아마도 그들이 기반한 절대다수일 것이다. 주위에 자신과 비슷한 생각과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군중에 묻혀서 익명성을 보장받은 채 거짓을 유지 및 수호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그들 중 대부분은 뒤로 빠진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이 스스로 앞에 나선다. 누가 부탁하지도 시키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열혈 분자는 언제나 존재한다. 그들은 거짓 선지자가 된다.


거짓 선지자들은 이런 군중의 심리를 잘 알고 이용해 먹는다. 유사과학이 마치 과학인 것처럼, 마치 그들이 믿는 미신이 과학과도 같이 증거에 기반한 것처럼 거짓 사실을 유포하고 사람들을 속인다. 그리고 은연중 그들의 공통된 적이 되어버린 과학을 더욱더 이단시하고 악마화 시키는 작업을 진행한다. 평화를 지키고 신앙을 지킨다는 명목 하에 말이다. 그러나 그들의 본심은 억지일 뿐이다. 그저 자기의 신념에 불과한 것을 억척스럽게 일반화시켜 군중몰이를 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문제라고 본다. 중세의 그 거대한 종교의 힘도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무너졌다. 물론 그 가운데 희생된 많은 사람들이 존재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과학의 자정작용과 이성의 합리적인 힘은 싸우지 않고 그 목적을 달성할 것이다.


신앙과 과학 사이의 이런 혼란을 야기한 자가 누구일까. 그 범인이 누구일까. 나는 이것을 싸움인 것처럼 만든 자가 바로 범인이라고 본다. 과학은 싸울 마음도 없었을뿐더러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과학과 신앙 사이의 싸움은 성립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단지 해석의 문제일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진리도 어떻게 해석되는지에 따라 다르게 인식될 수 있지만, 교단 교파를 떠나 모든 기독교가 공인하는 항목들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해석의 여지가 열려 있다는 점을 간과하면 안 된다. 그렇다. 이 열려있음을 받아들이냐의 문제가 어쩌면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가장 시급한 인식의 개혁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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