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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웅 Mar 07. 2021

도피

도피.


잡다한 생각에 힘들어질 때면 책을 읽는다. 책의 난이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내 머리와 가슴을 훔쳐가 쉼을 제공해주면 된다. 도피라고 해도 좋다. 난 그런 도피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내가 좋고, 이젠 도피라는 말도 조금씩 좋아진다. 


나에게 독서는 무언가를 더하기 위한 작업이 아니다. 예전엔 그랬었다. 더 많이 더 빨리 비대해져서 더 높은 곳을 날기 위해서였다 (그거 아는가. 높이 날면 멀리 볼 수 있지만, 자세히 볼 수 없다. 멀리 보는 목적은 그 꿈꾸는 갈매기도 모를 것이다. 이는 자칫 내 옆의 한 사람이 아닌 인류 전체를 사랑하도록 사람을 변질시킬 수 있다). 효율이 중요했다. 제한된 시간과 제한된 체력을 고려할 때마다 나는 더 초조해졌다. 독서하는 나는 쫓기는 나였다.


한계를 감지할 때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 패턴을 보이는 것 같다. 한계를 모를 때처럼 그 한계를 초월하고자 자신의 살을 갉아먹으면서까지 애를 쓰며 스스로 쫓기는 삶을 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한계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그 한계를 즐기는 삶을 택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이 두 가지를 인생의 전반전과 후반전으로 부른다. 인식의 전환점이라고 해도 좋겠다.


도피라는 단어가 좋아지는 이유는 후반전이 가지는 이중적인 뉘앙스를 가장 잘 대변해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전반전에 심취해있거나 후반전을 전반전의 연장전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도피라는 단어가 불명예스러운 의미를 지닐 것이다. 길은 하나밖에 없고 뭔가가 잘 풀리지 않으면 자신의 노오오력 부족이라며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게 상식인 사람들에겐 도피는 타협이고 타협은 곧 실패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생에 길은 하나가 아닐뿐더러 직진 코스도 아니다. 알고 보면 나는 여러 개의 길 위에 서 있다. 어떤 길은 잘못 들어선 길일 수도 있고, 또 어떤 길은 결승선이 없는 길도 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 도피는 도피가 아니라 풍성한 삶을 즐기기 위한 컨트롤의 이미지를 입게 되는 것이다. 


책은 나의 훌륭한 도피처다. 우린 누구나 도피처가 필요하다. 스스로 쫓기는 사람에게 도피는 수치일 수도 있겠지만, 삶을 즐기는 사람에게 도피는 안식이다. 쉼이고 숨이다. 인생의 후반전에 들어온 사람들이라면 도피처로 잠시 피해 쉼을 누리는 행위를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이 역시 인생의 풍성한 행복의 조각 중 하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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