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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웅 Mar 23. 2021

각성과 잔상

변화의 무게중심

각성과 잔상.


좋은 글을 읽을 때 얻는 유익은 각성에 그치지 않는다. 잔상의 지속력에 방점이 있다. 각성은 한순간이지만 그것이 삶을 변화시키는 건 아니다. 각성은 이벤트이지만 잔상은 일상으로 스며든다. 스며들지 않으면 변화의 시작은 일어나지 않는다. 각성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라 야심 찬 계획을 세우고 마는 효과에 그칠 때가 많다. 시작만 창대하고 끝이 없을 때가 흔하다는 말이다. 강한 각성이 항상 강한 잔상으로 이어지지도 않는다. 돌아보면 정말 별 것 아닌 기억의 조각이 잔상으로 남아 그 순간을 추억하게 하는 경험은 아마도 우리 모두가 해보았지 않나 싶다. 머리가 원하고 머리가 좋아하는 것이 삶과 무관할 수 있다. 우리의 일상은 머리가 아닌 몸, 그러니까 습관이 지배한다. 그러므로 삶의 변화는 습관을 바꾸어내는 일이다. 각성이 우리를 흥분시키는 이유는 새로운 방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한된 역량과 그릇을 가진 우리는 머리로만 그 새로운 방향을 즐기고 말 때가 많다. 상상은 얼마든지 가능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진짜 변화된 삶은 기존의 습관을 뜯어고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상상으로 추가하는 건 쉬워도 현실에서의 추가는 반드시 버림이 수반되어야 한다. 버리고 버려야 아주 약간의 수정이 가해지고 변화가 일어난다.


각성과 상상에 머무는 깨달음으로 마치 자신의 삶이 변화된 것처럼 착각하는 이들을 가리켜 나는 교만하다고 부른다. 주로 지식층의 사람들이 이에 속한다. 물론 모든 지식층에 해당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들의 특징은 말과 글이 유려하며 사회적 권위를 가지고 있다. 적당한 정도로 틈새를 일부러 만들거나 드러내어 사람들에게 보여주기도 한다. 100% 완벽함보단 90% 완벽함을 보여야 인간성도 느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로 영악한 존재들임에 틀림없다. 능수능란한 이런 부류의 놀음에 나는 더 이상 놀아나고 싶지 않다.


좋은 글이란 자로 잰 듯한 논리로만 구성되진 않는다. 물렁뼈로만 된 감성팔이 글도 좋은 글이라 할 수 없다. 사람의 경험은 시공간에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어떤 각성이 일어나고 그것이 잔상으로 이어져 삶의 유의미한 변화를 일으키는 글은 명제적 진술로 논리 정연하게 써진 글이었던 적은 놀랍게도 한 번도 없다. 자기 연민에 빠지거나 대중과 유행을 의식해서 써진 감성팔이 글이었던 적도 한 번도 없다. 읽고 나서 가슴이 따뜻해지고 그 안에 깔린 논리도 받아들여지면서 계속 생각나며 기꺼이 그 글이 말하는 바를 따라 하고 싶게 만드는 글은 보편적인 비명제적 진리를 어떤 구체적인 개별자의 입을 통한 경험과 논리로 잘 버무려진 글이다. 공감받기 위해 써진 글이 아니지만 공감이 절로 일어나는 글. 별 것 아닌 일상 얘기인 것 같은데 내 머리와 가슴 밑바닥에 깔린 무언가를 건드려 마음에 기쁨과 소망을 갖게 만드는 글. 가르치려거나 정보를 알려주기 위해 써진 글이 아닌 나눔의 내러티브로 써진 글. 아, 나는 이런 글들을 살면서 얼마나 더 읽게 될 수 있을까. 나는 이런 글을 살면서 한 편이라도 제대로 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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