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아이를 간직한 사람

by 김영웅

눈에 아이를 간직한 사람


어른이 되면서 우린 점점 경이감에 무뎌진다. 동시에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기적과 신비도 자취를 감춘다. 어른이 되어버린 우리는 계몽되어 이상과 현실을 분별할 수 있게 되었고, 이성과 경험에 뿌리를 내린 삶에 천착하게 되었다. 설명할 수 없는 현상 모두를 무지와 무속의 영역으로 제한시켜 버렸고 마법에서 풀려난 사람처럼 우린 과학으로 모든 걸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궁극적으로는 이성적으로 살아내지도 못하면서 우린 그 삶을 이상으로 여겼고, 이성을 모든 것을 가늠하는 잣대로 삼았으며, 그것을 교양이라고 믿게 되었다. 이것이 현재 우리 어른들의 모습이다.


종종 나는 무엇이 성숙한 것인지 어떤 사람이 계몽되고 교양 있는 사람인지 고요한 시간에 나 스스로에게 조용히 다시 묻곤 한다. 예전에는 한 번도,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질문들을 최근 몇 년 사이에 부쩍 많이 하게 되었다. 이제야 철이 드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나는 수많은 생소한 질문들 앞에서 당황스러워하면서도 다행히 그 목소리들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고 천천히 답을 해가는 방식을 선택했던 것 같다. 그렇게 6년이 넘는 삶을 새롭게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나는 나그네요 순례자다.


아무래도 내가 생각하는 답은 회귀하는 듯한 인상을 풍긴다. 그러나 단순한 복고가 아니다. 어린아이가 느끼는 경이감이나 그들이 생각하는 기적, 신비와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저녁노을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느낄 줄 알게 되었고, 사그라드는 불길을 바라보며 안타까움을 느낄 줄 알게 되었으며, 기적과 신비는 자취를 감춘 게 아니라, 너무나 일상적인 모습이라 그렇지, 여전히 우리 주위를 가득 매우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보이지 않고 막연한 그 무언가만을 바라던 아이가 아니라 이젠 빛바랜 기적과 빛바랜 신비 안에서, 그 가시적인 모습 안에서 진정한 기적과 신비를 볼 줄 알게 된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뜻하지 않게 생겨난 마음의 목소리가 있다. 이건 회귀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다시 나는 보이지 않고 막연하게만 느껴지는 기적과 신비도 기대하게 되었다. 아이 때의 마음과 거의 다르지 않다. 다만 어른이 되면서 알게 된 많은 것들의 목소리와 대립되고 자주 묻혀버린다는 게 흠이지만 말이다. 앞으로도 나는 이 목소리의 볼륨을 결코 줄이거나 제거하지 않을 생각이다. 오히려 자주 귀 기울여 들어볼 작정이다.


나는 여전히 이성적인 사람이 되길 원한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내지 못하는 나 자신의 취약함도 인정한다. 그리고 그 한계를 없애려 하지 않고 오히려 넉넉히 안고자 한다. 이성이 너무 치밀해지지 않도록 일부러 논리와 합리로만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이성적이지 못하다는 말보다는 따뜻하지 못하다는 말이 사람에겐 더 치명적일지도 모른다. 이 둘 사이의 줄다리기에서 과연 언제나 승리할 수 있을진 알 수 없지만, 나는 어쨌거나 계속 애쓸 작정이다. 눈이 깊은 사람은 그 눈에 아이를 간직한 사람이라 믿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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