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체와 개성
시간적으로는 고전과 현대를 넘나들고, 공간적으로는 미국, 서유럽, 동유럽, 일본, 러시아, 그리고 한국 등을 넘나드는 다양하고 다채로운 소설을 읽다 보니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볼 수 있게 된다. 그중 하나는 작가의 문체랄까 개성이랄까 하는 작가의 고유한 그 무엇과 그것의 중요성이다.
한국에서 노래를 잘하는 사람 수가 급격하게 늘어난 이유를 노래방의 보급과 한국 특유의 ‘붐’ 문화 등으로 들 수 있겠지만, “노래를 잘한다는 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하나의 답만이 존재하진 않을 것이다. 누군가는 가창력, 즉 얼마나 높은음과 낮은음을 자연스럽게 내며 가사의 내용과 그것이 담고 있는 느낌을 호소력 있게 전달할 줄 아는지를 가수로서의 최고의 자질로 들 것이다. 그렇지만 또 누군가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가창력은 가수로서 기본 중 기본이라는 전제를 깔면 더더욱이나 가창력이 좋다고 해서 좋은 가수라고 말할 수만은 없게 된다. 현실에서도 가창력이 좋을수록 더 좋은 가수라는 공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저평가된 채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고 있는 이들이 더 많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자본주의의 논리가 여기서도 그대로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가창력을 제외한 어떤 자질이 가수에게 필요하고 또 더 좋은 가수로 만들어줄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이전에 먼저 묻고 싶은 게 있다. 당신은 어떤 가수를 좋아하는가? 그리고 왜 좋아하는가? 답은 들을 필요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저마다 다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저마다 좋아하는 가수가 다를까? 가창력은 대체로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자질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데, 왜 우리가 좋아하는 가수는 가창력이 좋은 가수만은 아닌 걸까? 이 질문 앞에 서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처럼 한 가지 답으로 몰리게 된다. 여러 가지로 대답할 수 있겠지만, 그것들을 한꺼번에 아우르는 표현은 ‘개성’, 즉 그 가수만의 고유한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가창력과 더불어 가수에게 꼭 필요한 자질일 것이다.
글에서도 마찬가지 논리가 성립하는 것 같다. 먼저 다음 질문에 스스로 답을 해보자. “문장력과 더불어, 비문학과 문학 읽기로 내공이 다져진 이후 숱한 글쓰기 연습 끝에 필력이 좋아진다면 과연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반은 YES, 반은 NO이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우선 YES라는 대답은 ‘좋은’이라는 뜻을 포괄적으로 해석할 때다. 달리 표현하면, 이분법적으로 세상에는 좋은 글과 좋지 않은 글만이 존재한다고 할 때 내 대답은 YES라는 말이다. 당연히 문장력이 좋고, 균형 있는 읽기로 인해 내공이 다져지고, 글쓰기 연습까지 성실하게 한다면 도저히 글을 못 쓸 수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글의 가장 기본적인 목적은 소통이고 전달이기 때문에 이렇게 훈련된 사람이라면 이분법적인 구분에서는 언제나 좋은 글을 쓸 수밖에 없다. 자기 뜻을 조리 있게 전달할 수 있고 소통을 원활하게 할 수 있게 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좋지 않은 글 쓸 수 있는 기회가 박탈당하는 셈이다.
이번엔 ‘좋은’이라는 뜻을 조금 세분화시켜보자. 이 맥락에서 나의 대답은 “NO”이다. 세상에는 좋은 글과 좋지 않은 글, 이렇게 두 가지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좋은 글도 여러 단계로 나뉜다고 가정해보자. 사실 이게 우리 현실에 가깝다. 이 글에서는 간편하게 좋은 글을 단지 두 그룹으로만 나눠서 얘기해볼까 한다. ‘그냥 좋은 글’과 ‘탁월하게 좋은 글’로 말이다.
눈치챘겠지만, 그냥 좋은 글과 탁월하게 좋은 글의 차이는 앞에서 언급했던 개성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가창력이 좋은데 고유한 개성까지 가진 가수가 기억에 오래 남게 되고 회자되는 것처럼, 필력도 좋은 데다가 고유한 문체까지 갖춰진 작가의 글은 독자들의 마음을 훔치는 법이고 독자로 하여금 더 읽고 싶어 지게 만들며, 그 작가가 과거의 사람이라면 저작 모두를 읽도록 자연스레 유도하게 된다. 그 누구도 가지지 못한 고유한 스타일의 글이기 때문에 그것을 맛보고 매력을 느끼고 길들여진 독자들은 그 작가의 작품 아니면 다른 어떤 작가의 작품으로도 만족할 수 없게 된다. 한 마디로 중독 현상까지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글을 나는 ‘탁월하게 좋은 글’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즉, 필력이 좋은 작가가 쓴 글을 ‘그냥 좋은 글’로 볼 수 있다면, 필력과 더불어 문체까지 매력적인 작가가 쓴 글을 ‘탁월하게 좋은 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개성이란 무엇인가? 가수의 개성이라고 한다면 가장 먼저 음색을 들 수 있다. 한 사람의 목소리는 고유하기 때문에 똑같은 목소리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서글픈 노래를 부르는데 절묘하게 심금을 울리는 목소리를 가진 가수가 인기까지 좋다면, 그 노래는 곧 그 가수와 동일시되는 일까지 벌어지게 된다.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가수의 음색과 같은 게 작가에게도 존재할까?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문체다. 동일한 사건이나 상황을 묘사해도, 혹은 동일한 서사를 들려줘도 작가마다 표현하는 방식은 다르기 마련이다. 단어의 선택, 문장의 구성, 단락의 배치 등 저마다의 스타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목소리가 다르듯 작가마다 문체가 다르다는 말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창력이 뒷받침되는 가수의 개성이 가창력이 없는 가수의 개성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듯, 필력이 뒷받침되는 작가의 개성이 필력이 없는 작가의 개성보다 더 중요하다. 즉, 작가의 문체가 돋보이게 될 땐 필력이 뒷받침해줄 때에 한한다.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지는 글쓰기는 아무래도 비문학보다는 문학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주장과 증명 혹은 보고 등이 주가 되는 글쓰기에는 문체의 영향이 적을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중요한 건 정확도와 간결함일 뿐이다. 정보를 전달하는 게 주목적이기 때문에 장문보다는 단문이 선호되며 막연하게 보일 수 있는 비유나 상징보다는 사실 그대로를 거품 없이 전달하는 글쓰기가 권장된다. 물론 칼럼이나 논설을 탁월하게 쓰는 사람에 한해서는 문체를 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일반적인 보도성의 글쓰기를 넘어 문학의 영역을 넘나드는 글쓰기를 선보이기 때문이다. 정확과 간결을 넘어서는 적재적소의 상징이나 비유로 함축적이면서 깊은 의미를 단번에 드러내는 글은 읽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금치 못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문체가 돋보이는 영역은 문학 영역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얼마 전에 내가 쓴 글에서 한강 작가와 정유정 작가를 비교하기도 했는데, 그들의 글은 각각 묘사 중심과 서사 중심으로 비교할 수도 있지만, 문체가 현저히 다르다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다. 뿐만 아니다. 소설이나 시나 에세이를 읽을 때 작가 이름을 보지 않아도 어느 작가의 글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게 만드는 요소는 아무래도 필력보다는 문체다. 문체는 바로 그 작가를 대변하는 것으로 각인되게 된다.
여기서 절대 간과해선 안 되는 사실이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다시 한번 강조한다. 문체는 필력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날개를 달 수 있다는 점이다. 필력 없는 문체는 가창력 없는 음색과 같아서 한번 주목을 받을 수는 있으나 쉬이 잊히게 된다. 지속하는 건 불가능하며 발전도 없다. 글쓰기를 이제 막 시작하려는 분들에게 나는 자신만의 문체를 가지라고 조언하기보다는 필력을 먼저 기르라고 조언하고 싶다. 기본을 먼저 탄탄히 다지라는 말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작가의 글을 흉내도 내보고, 그것을 수정하는 과정을 통해 자기만의 문체를 가지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시도조차 나는 나중에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먼저 균형 있는 읽기로 많이 읽고 많이 써봐야 한다. 많은 글을 쓰려고 하지 말고 많은 글을 쓸 수 있는 몸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다음 글은 글 쓰는 몸만들기에 관한 글이 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