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드루 포터 저, ‘사라진 것들’을 읽고
우수, 권태, 공허, 그리고 뜻밖의 위로
앤드루 포터 저, ‘사라진 것들’을 읽고
제임스 설터와 켄트 하루프를 섞어 놓은 느낌이랄까. 처음 읽는 앤드류 포터의 글은 덤덤한 일상을 기술하면서도 놓치기 쉬운 순간들을 세밀하게 포착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깊은 한숨을 쉬게 하고 먹먹한 가슴이 되게 만든다. 인생의 절반을 이미 살아낸, 마흔이 넘은 중년 남성이 매 단편의 주인공인데, 주인공과 비슷한 연배라면 아마도 나처럼 책 속의 문장들만이 아닌 행간까지도 자연스레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거기서 나는 설터의 '가벼운 나날'에서 맛보았던 반짝이는 권태와 공허를 느꼈고, 켄트 하루프의 '축복'에서 들을 수 있었던 일상의 소중함을 더욱 감사하며 소망하게 되었다.
미국 생활을 11년간 해보아서 그런지 이 작품은 굉장히 미국적인 것 같았다. 남녀 관계가 다 그렇고 그렇지 않냐고, 사십 대 중년 남성이 겪는 권태감과 무력감은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는 게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아는 만큼 보이는 법. 남편과 아내의 일상적인 대화나, 일터에 다녀온 이후 가정에서 보내는 시간들은 한국에서는 좀처럼 공감할 수 없고 미국에서는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정서가 흐른다. 간단히 말하자면, 적어도 저녁이 있는 삶, 혹은 적어도 먹고살 만한 환경에 처한 사람만이 고민하고 갈등할 수 있는 여유(?)가 전제가 되어야 이 작품이 내뿜는 은은하면서도 자칫 중독될 수 있는, 고요한 허무감에 제대로 당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 한때 그렇게나 열정적이었던 자신의 모습도 빛바랜 사진 한 장으로 추억된다는 것. 불쑥 찾아온 삶의 권태, 그 권태와 함께 조용히 스며드는 공허감.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가만히 바라보며 한숨 짓기도 하고,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에 때때로 휩싸이기도 하며, 다 소용없다는 무기력함으로 오지도 않은 미래마저도 회색빛으로 물들여 버리는 건 아마도 욕망하고, 사유하고, 기억하는 인간만이 가진 공통된 속성일 것이다.
우울할 수 있지만 아련한 기억이 만들어내는 잔잔한 우수에 잠겨보고 싶은 독자라면 이 책을 권한다. 의외로 위로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참고로 이 소설집은 짧은 단편이 15편 수록되어 있는데, 순서는 상관이 없고 모든 단편을 다 읽지 않아도 되니 아무 데나 펼치거나 끌리는 제목의 글만 읽어도 무방하다. 마흔이 넘었다면, 조용히 혼자 있는 밤에 이 책을 삼십 분이라도 읽어보면 내 말이 무슨 의미인지 단번에 알 것이다.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