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백치‘를 다시 읽고
누가 지혜자인가?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백치‘를 다시 읽고
재독의 맛은 초독 때 보지 못했고 느끼지 못했으며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뒤늦게 음미하는 데에 있다. 재방문은 첫 방문의 기억을 강화시키기도 하지만, 그 기억을 벗 삼아 처음보다 더 깊은 단맛을 느끼게 해 주고, 좀 더 느긋하게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어울림을 맛보게 해 준다. 적어도 줄거리를 따라가는 급급함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일까.
정말이지 기적 같은 독서모임 덕분에 나는 일생에 한 번도 읽기 힘든 도스토옙스키 주요 작품들을 두 번이나 읽어 나가는 복을 누리고 있다. 독서모임 일주년에 맞춰 읽은 작품 (이른바 '재독 프로젝트'의 아홉 번째 작품)은 ‘백치’였다. 5년 만에 다시 읽었기 때문일까. 앞의 여덟 작품보다 유난히 이 작품에서 나는 재독의 묘미를 더 잘 느낄 수 있었다. 그동안 내 시선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같은 작품이라도 다르게 읽힌다는 건 시차를 두고 일어난 내 안의 가치관과 세계관의 변화 때문일 테니까. 그리고 그것은 곧 나의 내면의 성장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초독 감상문에서 나는 작품 속 주인공이자 백치로 등장하는 미쉬낀 공작을 전적으로 변호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누가 백치인가?'라고 물으면서 나는 미쉬낀 공작이 아닌, 오히려 그를 백치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화살을 돌리며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백치일지 모른다고 반박했었다. 이번엔 공작에 대한 나의 스탠스가 조금 달라졌다. 누가 백치인지 묻는 것보다 누가 더 지혜로운지 묻게 된 것이다. 백치로 등장하는 미쉬낀 공작으로부터 나는 초독 때 착안했던 성스러운 유로지비의 모습만이 아니라, 이상적일 정도로 고결하고 선하고 정직하지만, 인간의 모순된 본성이라 할 수 있는 이율배반성을 마주할 때면 어김없이 공포를 느끼며 꼼짝없이 얼어붙고야 마는 공작의 나약함을 주의 깊게 보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선 미쉬낀에 대한 나의 시선의 변화를 중점적으로 풀어볼까 하는데, 그러기 위해 도스토옙스키의 중기작 중 하나인 '상처받은 사람들'에 등장하는 한 인물, 알료샤를 잠시 소환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상처받은 사람들’의 두 주인공은 나따샤와 알료샤다. 재독 감상문에서 나는 이미 이 둘을 비교한 적이 있다. 알료샤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 아이 같은 천진난만함 혹은 순수함을 대변하는 인물로 보았고, 나따샤는 아이와 반대되는 속성이라고 할 수 있는 어른의 성숙함 혹은 어른스러움을 대변하는 인물로 보았다. 이 두 주인공은 서로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끝내 이루어지지 않는데, 아니 이루어질 수 없는데, 그 이유를 나는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교집합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해석했었다. 아이의 모습을 상실한 어른은 아이 같은 어른으로부터 순수함에 대한 동경은 할 수 있을지언정 동등한 선상에서 관계를 맺을 수는 없으며, 몸은 어른이지만 내면은 여전히 미성숙한 어른은 성숙한 어른을 이해할 수 있는 역량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알료샤는 후자에 속했다.
한편 나는 고결함의 측면에서 알료샤를 또 다른 인물 넬리와 비교하기도 했었다. 알료샤가 인간 수준에서의 고결함이라면, 넬리는 신적인 수준으로 승화된 고결함, 즉 성스러움과 맞닿아 있다고 해석했었다. 도스토옙스키가 추구했던 아름다움 (미)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성스러움을 가장 연약한 존재인 넬리에게 심어놓았다고 본 것이었다. 이어서 나는 알료샤의 고결함은 사람들로부터 관심과 주목을 받을 수 있었을지는 몰라도 그들을 변화시키는 힘은 없다고 보았다. 그를 사랑하기까지 했던 나따샤에게까지 알료샤는 결국 커다란 상처만을 안겨주었고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알료샤는 나따샤를 품을 수 없었다. 그의 고결함은 아이의 천진난만함을 가지는 동시에 자기만 아는 아이의 이기적인 본성까지도 그대로 머금고 있었던 것이다. 성숙하지 못한 순수함을 가진 어른, 그래서 타자를 헤아리지도 품지도 못하는 어른아이가 바로 알료샤였던 것이다.
'백치'를 처음 읽을 땐 내가 도스토옙스키 작품에서 유로지비의 원형으로 보는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의 예고르, 그리고 '죄와 벌'의 소냐나 리자베따, 혹은 앞서 언급한 대로 '상처받은 사람들'의 넬리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과 미쉬낀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동일선 상에 두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번에 이 작품을 다시 읽으면서 나는 미쉬낀으로부터 넬리가 아닌 알료샤의 모습도 보게 된 것이다. 아마도 그 이유는 초독 때와 달리 재독 땐 ‘상처받은 사람들’을 이미 두 번이나 읽은 후였기 때문일 것이다. 요컨대 고결함 측면에서 미쉬낀을 알료샤와 넬리에 비교한다면, 미쉬낀은 알료샤와 넬리의 중간 정도에 위치하지 않나 싶다. 미쉬낀으로부터는 넬리에게서 느껴지는 성스러움이 느껴지지 않으며, 대신 알료샤의 천진난만함이 오히려 도드라져 보였기 때문이다. 성숙한 어른이라 하더라도 가까이하기에는 망설여지는 인물, 실제론 백치가 아니라 현명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왠지 거리를 두고 지내고 싶은 사람, 이것이 바로 거품을 뺀 현실 속 미쉬낀의 실체가 아니었나 싶다. 나는 이런 인물을 평가할 때 지혜롭다는 표현은 아무래도 쓸 수 없다고 느낀다. 말하자면 미쉬낀은 백치도 아니지만 지혜자도 아니라는 게 내 지론이다.
미쉬낀 공작의 고결함이 한 가지 색이 아니라 스펙트럼을 가진다는 사실을 착안하고 나니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던 작품 속 여러 부분들이 명쾌해지는 효과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이 작품의 결말 부분이 납득이 되었다. 미쉬낀은 나스따시야를 살해한 로고진과 함께 시체가 된 나스따시야 옆에서 하룻밤을 잔 뒤 (그로테스크하지 않은가? 섬뜩하지 않은가?), 로고진은 살해범으로 시베리아 유형을 가게 되고, 미쉬낀은 이전보다 더 심한 백치가 되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심해진 걸로 보아 기억 상실이나 치매 증상까지 겹친 듯하다) 다시 스위스 병원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그리스도의 변주로 상징되는 미쉬낀 공작은 결국 아무것도 변화시키지도 얻지도 못한 채 모든 걸 잃고 자신은 더 마이너스가 되는 결과를 보여주며 작품이 마무리된다. 미쉬낀은 로고진에게 나스따시야를 살해한 흉기가 무엇인지 묻는, 일견 엉뚱해 보이는 질문 말고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작은 일에도 감동하고, 사람들로부터 선한 모습을 찾아낼 줄 알며, 자주 남들이 보지 못하는 사람의 내면까지도 꿰뚫어 보아 현명한 판단을 내릴 줄 알았던 미쉬낀 공작은 살인사건 현장에서 객관성과 공정성을 잃은 채 살인자 로고진에게 연민까지 느끼며, 정상적인 살인사건의 목격자라면 으레 행해야 했던 신고나 자수 권유 등을 무시하고 살인자의 제안을 그대로 따르는, 다분히 광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누군가는 이런 모습을 미쉬낀 공작이 모든 것을 이미 다 파악한 뒤 행한 의도적인 행동이라고 해석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눈엔 더 이상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내 눈엔 그저 어쩔 줄 몰라 당황한 아이, 아니 그 정도를 넘어 완전히 넋이 나갈 정도의 공포로 인해 충격을 받은 나머지 멘탈이 붕괴된 환자가 서 있을 뿐이었다.
비슷한 식이다. 결말 부분 말고도 여러 장면에서 미쉬낀 공작은 일견 의아하게 보일 수밖에 없는 행동들을 자주 선보이는데, 그것들을 모두 그가 너무 순수해서, 혹은 너무 고결해서,라는 이유만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내 모습으로부터 나는 이번에 자유로울 수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를 전적으로 두둔하고 변호하려는 내 모습이 순수하지도 고결하지도 않다는 점과 더불어 그의 모습을 자꾸만 완전성에 비추어 후한 점수를 주려는 내 모습에서 나는 불편함과 부자연스러움과 강박을 느꼈던 것이다. 미쉬낀 공작은 그리스도를 닮았지만, 그 모습은 모든 것이 선하고 좋은 면만 수면 위로 올라왔을 때라는 조건이 붙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가 겉모습이 아니라 속사람을 보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도 모두 인간에게 있는 선한 모습만으로 상황이 설명 가능할 때에 유효했다는 생각이다. 그에겐 인간의 모순된 본성, 이율배반성을 깊이 이해하고 품고 다루는 역량이 턱없이 부족했던 것 같다. 그는 어두움의 존재 (이는 작품 속에서 로고진, 혹은 어디선가 불안할 때 느껴지는 로고진의 시선으로도 상징된다)는 인지하고 있으나 그것을 두려워하고 그것으로부터 공포를 느끼며 그것과 접촉하게 되면 얼음이 되고 마는 나약함을 가진 ‘순수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지혜로움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선하기만 한 자에게 지혜자의 타이틀을 부여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거짓과 죄악이 가득한 이 세상이라는 배경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혜로움은 선과 악으로 인해 지난한 변증법적 성장을 버텨내고도 여전히 선을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인간에게 숙명적인 본성으로 내재된 이율배반성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깊이 이해한 상태로 기꺼이 그 사람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사람에게 있지 않을까 싶다. 나스따시야와 로고진 덕분에 미쉬낀도 마침내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러지 못한 채 정신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육체적인 부분까지 차단되어 버린 그의 마지막 모습에서 나는 성스러움이 아닌 나약함을 느끼고 애석해한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거라는 그의 말도 다분히 이상으로만 남겨진 것 같다. 적어도 그는 맛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재독 감상문을 이렇게 마치려니 아쉬움이 크다. 그러나 독서모임 가족들과 함께 나눈 뒤 더욱 깊고 풍성한 이야기들을 한데 모아 ‘함께 읽기’를 쓸 생각을 하니 큰 위로가 된다. 이 작품 안에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그 인물들을 하나씩 살펴보고 그들의 관계 또한 주의 깊게 바라보는 것도 절대 놓칠 수 없는 관전 포인트가 될 것이다. 아직 하지 못한 말들이 많지만, ‘함께 읽기’에서 보충할 작정이다.
*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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