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정 저, ‘영원한 천국’을 읽고
여전해서 반가웠고, 여전해서 아쉬웠던
정유정 저, ‘영원한 천국’을 읽고
3년 전 그때 그 느낌이 거의 그대로 재현되었다. 공포가 엄습해 왔고, 내 가슴은 숨 가쁘게 뛰었다. 나도 모르게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 미친놈처럼 연신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이렇게 몰입해서 책을 읽은 게 얼마 만인가 싶었다. 아, 역시 정유정이었다. ‘7년의 밤’, ‘28’, ‘종의 기원‘, 그리고 3년 전 출간 즉시 읽었던 ’완전한 행복‘에 이어 다섯 번째로 만나는 정유정은 여전했다. 그녀 특유의 휘몰아치는 서사는 숨 쉴 틈조차 주지 않을 정도의 긴장 가운데 이번에도 나를 급박하게 내몰았다. 523 페이지도 단편으로 느껴질 만큼.
'7년의 밤'과 '완전한 행복'을 나는 1, 2순위로 매긴다. 그리고 이 순위는 이번 작품을 읽고 나서도 변동이 없다. 정유정은 여전히 정유정이었지만, 또 여전히 정유정이기도 했다. 기대를 많이 했었다. 앞 단락에서 언급한 대로 정유정 특유의 장점이 고스란히 살아 있어 기대의 절반은 채워졌지만, 작품성이랄까 발전성이랄까 깊이랄까 하는, 딱히 특정한 한 단어로 잡아내기 힘든 그 무엇이 이번에도 갈증으로 남았다. 정유정이 보여줄 수 있는 정점은 이미 보여준 게 아닌가 싶었다. 내 기대의 절반은 그렇게 채워지지 못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정유정의 차기작을 기다리게 될 것이다. 이 갈증은 그녀만이 해소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정유정 작가를 한강 작가와 비교한 글을 쓴 적이 있다. 작가를 한 단어 안에 욱여넣을 수는 없겠지만, 나는 각각 서사와 묘사를 대표하는 작가로 해석했었다. 정유정의 소설은 빠르고, 한강의 소설은 느리다. 정유정의 소설은 동적이어서 어떤 커다란 사건과 상황을 수습하는 과정에 초점이 맞춰진다. 반면 한강의 소설은 상대적으로 정적이어서 어떤 사건이나 상황의 전개보다는 그 사건이나 상황이 그림처럼 그려져 어떤 이미지로 남는다. 자연스레 정유정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사건과 상황의 전개에 발을 맞춰 빠르게 움직이다 보니, 이미 급박한 전개에 흥분한 독자들은 그들의 내면에 집중할 충분한 시간을 확보할 수 없다. 그러나 한강의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사건이나 상황보다 언제나 한 걸음 앞서 있기 때문에 독자들은 그들의 내면에 집중할 수 있다.
문체도 다를 수밖에 없다. 정유정의 문체는 무거울 수 없다. 쓰나미나 토네이도를 떠올릴 만큼의, 정유정 특유의 급박한 서사에 모든 게 소비되어야 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문장은 단문 위주로 될 수밖에 없고, 사용되는 단어는 통속적인 문화에 녹아든 단어여야 한다. 이런 식으로 한국인이라면 남녀노소 누구라도 정유정의 이러한 매력에 흠뻑 젖게 되는 것이다. 한편, 한강의 문체는 무겁다. 사건이나 상황보다 인물에 초점이 맞춰지기 때문에 다분히 관념적이다. 관념적이다 보니 사상이나 철학 개념이 녹아 있어 정유정의 작품을 읽고 혼이 빠진 독자들은 한강의 작품을 읽을 때면 난해하다거나 지루하다는 평을 하기 쉽다. 그러나 개별적인 작품에서 보편적인 인간을 성찰하고 통찰을 이끌어내는 하나의 문학작품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한강 작가의 소설은 인간의 본성 깊숙한 곳까지 들여다본 것 같은 느낌을 안겨 주고, 정유정 작가의 소설은 어떤 특별한 캐릭터를 가진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한 편의 영화나 드라마를 본 것 같은 느낌을 안겨 준다. 요컨대 한강의 등장인물은 보편적인 인간의 내면을 표현하지만, 정유정의 등장인물은 상대적으로 개별적이고 독특한 인간 유형을 보여준다. 그 결과 한강의 작품을 읽고 나면 잔상이 오래 남아 자꾸만 생각나게 되는 효과를 내는 반면, 정유정의 작품을 읽고 나면 잔상이 오래가지 않는다. 물론 정유정의 작품을 읽고 한동안 여운이 남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차이는 불안과 공포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한강 작품이 불안과 두려움을 안겨 준다면, 정유정 작품은 공포를 조장한다. 한강은 보편적 인간, 즉 나도 혹시?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 인간의 존재론적인 불안을 포함하여 숙명적인 본성에 천착하는 반면, 정유정은 특정 인물을 지정하여 그 사람으로부터 오는 공포를 이용하는 데에서 가히 천재적이다. 일례로 나는 '영원한 천국'을 읽고 여전히 칼잡이가 무섭다. 그러나 이 공포는 금세 사라질 것이다. 칼잡이는 보편적인 인간을 담지 못하기 때문이다.
흥미진진한 영화나 드라마를 시청하는 도중엔 너무 흥분도 되고 몰입도 하게 되지만, 끝나고 나면 별로 남는 게 없는 경험을 다들 한 번쯤은 해 보았으리라 생각한다. 비슷하다. '영원한 천국'을 몰입해서 읽었건만, 내 머릿속에서는 벌써부터 이 작품이 가진 세계관이나 인물들의 캐릭터가 빠른 속도로 잊히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그리고 '작별하지 않는다'의 이미지는 수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잔상으로 남아 있다. 물론 이건 나의 주관적인 해석에 불과하다. 하지만 나에겐 정유정 작가의 작품은 인간 본성의 심연을 충분히 건드리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강하게 남는다. 악한 인간, 욕망에 허우적대며 굴복당하는 인간의 여러 유형을 다각도에서 보여줬다는 점에선 박수를 쳐주고 싶지만, 나는 그녀가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나를 성찰하고 인간을 돌아보게 하는 그녀의 통찰이 묻어나는 소설을 쓰게 되기를 이 작품을 읽고 더 기대하게 된다.
구차하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변명은 가능하다고 본다. 이번 작품에서는 특히 잘 와닿지 않는 가상세계가 주요한 소재로 사용되고 작품에 흐르는 하나의 세계관으로 작동하는데, 정유정 작가가 스스로도 작품 뒤에 붙어 있는 '작가의 말'에서도 고백하듯 그녀는 이런 첨단과학이랄까 공상과학이랄까 하는 것에는 전문가가 아니다. 오로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비전문가로서의 공부와 작가의 상상력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착안점은 공감이 간다. 시대의 변화와 과학의 발달, 그리고 끊임없는 인간의 욕망, 영원을 향한 소망 등이 잘 버무려져 탄생한 주제였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주관적인 판단으로는 정유정 작가가 굳이 다루지 않아도 될 주제가 아니었나 싶다. 정유정의 고유한 매력은 대중성과 강렬한 서사 아닌가. 먼 훗날 가능할 수도 있는 가상세계 (이곳에선 인간의 육체를 제외한 모든 생각과 마음과 감정과 감각이 정보화되어 업로드되는 가상공간이다. 그곳에서는 죽어도 죽는 게 아니다. 죽으면 다른 삶을 선택하여 살 수 있다. 인간이 아닌 벌레로도 살 수 있다. 기억에 의존하여 세상이 구성되며 그곳에서 여러 가지 형태의 삶으로, 그야말로 영원히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이다. 제목 '영원한 천국'은 바로 이러한 공간을 희화화한 것이다)를, 과학자가 직업인 나도 잘 이해하기 힘들뿐더러 손에도 잡히지 않고 느껴지지도 않고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그런 세계를 소재로 삼아 대중성과 강렬한 서사를 살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차라리 정유정 작가는 도스토옙스키처럼 지극히 통속적인 주제, 이를테면 돈, 치정, 살인을 누구라도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시공간을 베이스캠프로 삼아 소설을 써 내려가는 게 그녀의 매력을 극대화시키는 방법이지 않을까 한다. 뻔한 상황, 뻔한 사건 속에서도 뻔하지 않은 인간의 이율배반적인 본성을 까발리는 그녀의 작품을 고대한다.
* 정유정 읽기
1. 7년의 밤: https://rtmodel.tistory.com/1232
2. 28: https://rtmodel.tistory.com/1243
3. 종의 기원: https://rtmodel.tistory.com/1314
4. 완전한 행복: https://rtmodel.tistory.com/1342
5. 영원한 천국: https://rtmodel.tistory.com/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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