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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웅 Oct 07. 2024

정원과 하나님 나라

이성희 저, ‘정원에서 길을 물었다’를 읽고

정원과 하나님 나라


이성희 저, ‘정원에서 길을 물었다’를 읽고


이상한 일이다. 한 정원사의 글이 늘 머릿속에서 그리고 있던 하나님 나라를 재현해 냈다. 마치 오순절 날 마가 다락방에서 일어났던 사건이 내게도 일어난 것 같았다.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행2:8)." 정원사의 언어가 과학자인 내 귀에 들렸고, 나는 그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행2:11)." 


저자가 내게 쓴 글귀가 떠올랐다. "자신의 언어로 복음을 담는 법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린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지만 별다른 통역 없이 서로의 언어를 이해한 것이다. 그는 정원사이고 나는 과학자이지만, 그래서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지만, 우리의 공통분모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 그리고 그 기저에는 예수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기치 못한 순간, 나는 낯설고도 익숙한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저자에게 감사한다.


책을 읽고 동경이 하나 생겼다. 천이를 거쳐 마침내 다다른 극상림에 꼭 한 번 가 보고 싶다는 것. 오랜 세월을 통해 최적의 생태적 안정성에 다다른 숲. 다양한 식물들이 햇빛과 공간을 나눠 쓰기에 가장 최적화된 모습으로 어울리며 살아가는 정원. 숲 자체만 아름답게 빛나는 게 아니라 공기를 정화하고 가뭄과 홍수를 예방하는 기능까지 완벽히 해 내는 그곳. 이러한 '숲 정원'을 머릿속에 그리자 지체 없이 하나님 나라가 떠올랐던 것이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천이'란 다양한 식물들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한 지역의 식생이 안정화되는 과정을 일컫는다. 이 기나긴 여정이 다다르는 울창하고 아름다운 숲은 다음과 같은 모습을 띤다고 한다. 


"이 숲은 전형적인 층위 구조를 보인다. 층위 구조란 성숙한 숲에서 나타나는 수목의 크기에 따른 계층 구조인데 가장 높은 곳에는 느릅나무, 참나무류, 백합나무 등 20-30미터에 이르는 교목들이 숲의 윤곽을 형성하고, 그 아래 그늘진 곳에는 생강나무, 단풍나무, 산딸나무 등 3-7미터 높이의 소교목 또는 아교목이 자리를 잡는다. 지면과 가까운 곳에는 진달래 등 2미터 이내의 관목들이 무성하고 맨 아래는 각종 지피식물들이 담요처럼 흙을 덮는다. (p120)"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이 인용구가 나에겐 하나님 나라를 생각나게 했다.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는 그곳 (사11:6). 동물의 왕 사자가 가장 나약한 짐승 중 하나인 어린양을 잡아먹지 않고 함께 뛰노는 그곳. 강한 자와 약한 자, 혹은 우월한 자와 열등한 자의 구분이 없는 그곳. 이미와 아직 사이인 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 병든 자, 장애를 가진 자, 귀신 들린 자, 억눌린 자들이 아무런 차이를 느끼지 못한 채 함께 정의롭고 공의롭게 살아가는 눈물 없는 그곳. 그곳은 곧 하나님 나라의 모습일 것이다. 그런데, 저자가 덤덤히 묘사한 천이를 거친 극상림이 이런 하나님 나라의 모습과 내겐 너무도 닮아 보였던 것이다.


생물학을 전공한 내가 그리는 하나님 나라는 생명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다양성이 아름다움으로 자리 잡은 곳이다. 손가락이나 발가락 수가 열 개가 아닌 사람들, 입술이나 입천장이 갈라진 채 태어나 평생 그 흔적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 다운증후군을 비롯하여 여러 증후군을 가진 채 살아가는 우리의 이웃들, 그리고 성소수자와 성정체성을 명확히 할 수 없는 사람들까지도, 그리스도인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모든 개별적인 사람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꽃으로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그곳 말이다. 


나는 창조세계를 이루는 다양한 생명체들의, 생명체들을 연구하는, 생명체들을 섬기는 각 사람의 언어로 복음을 담아 그것을 글로, 그림으로, 혹은 음악으로 다채롭게 표현하는 그날을 꿈꾼다. 그곳이야말로 하나님 백성들로 구성된 극상림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그 극상림이 지금, 여기 교회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모든 시공간이 되기를 책을 덮고 기도했다.


저자는 열두 가지 정원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환대의 정원부터 시작해서 겨울 정원까지 이르는 여정은 저자가 미국으로 건너가 정원사로 거듭나기까지의 수년의 세월과 자연주의 정원사가 되어 현재까지 누리고 있는 수년의 세월을 아우른다. 정원사로서 정원의 언어를 구사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당연한 언어가 전혀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의 귀에 들려지고 이해될 수 있게 글을 써낸다는 건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다. 개별적인 한 사람, 혹은 개별적인 한 직업의 언어에 갇히지 않고 그 아래에 뿌리처럼 존재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과하지 않게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의 직업이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임을 인지하고 있다는 말이며, 이는 곧 그 글을 쓴 저자가 성령께 잡힌 바 된 사람이라는 뜻도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개별적인 삶을 자신만의 언어로 노래하며 보편적인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아 전달하는 이 아름다운 과업을 저자는 훌륭히 해 내고 있는 것이다. 


책을 덮고 하고 싶은 것들이 많아졌다. 자만심에 가득한 건축도, 단단하게 막혀 있는 건축도 넉넉하게 다 담아내는 자연주의 정원, 그 환대의 정원에서 나는 자연을 닮은 정원이 갖는 강력한 포용과 조화의 힘을 느껴보고 싶어졌다. 화려한 꽃 잔치가 끝난 6월의 어느 날, 아젤리아 가든에 서서 나도 저자처럼 수수한 수국의 매력을 마음껏 그러나 조용히 느껴보고 싶어졌다. 거기서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빛나는 나의 내면을 비춰보고 싶어졌다. 식물원 방문객이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하는 9월 말부터 열리는 국화 축제에도 참여해 보고 싶어졌다. 소유하기보다 공유하고 나누는 정원에 앉아 그 일상의 시공간을 느껴보고 싶어졌다. 과거의 기억을 머금고 있는 어떤 것을 기념하는 정원에도 가 보고 싶어졌다. 그곳을 디자인한 정원사의 의도를 이해하고 타자와 세상을 공감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새로워지는 정원의 모습을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담아내고 싶어졌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의 소중함을 정원의 식물을 통해 느껴보고 싶어졌다. 한 포기 국화에서 천 송이 꽃이 나오게 하는 예술의 극치도 보고 싶고, 숨 가쁘게 이어지는 꽃 잔치의 절정인 6월의 장미를 땡볕에서 마주해 보고도 싶지만, 그것보다 나는 몸을 숙이고 자세를 낮추어 경건한 마음으로 흙을 덮고 바위를 덮은 이끼들을 살펴보고 싶어졌다. 그곳에서 예수의 마음을 가장 잘 느낄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화려한 정원이 아니라 이끼와 고사리가 낀 숲 정원에서 사람들이 오래 머물게 되는 이유를 나는 왠지 알 것만 같다.


덧붙여 나는 저자가 계획한 프로젝트 R을 마음 담아 응원하게 된다. 황폐한 땅을 회복하여 아름다운 숲으로 복원하는 그 계획은 황폐한 이 땅을 복음으로 회복시키는 선교와 닮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부흥 Revival, 회복 Restoration, 견고함 Resilience, 화해 Reconciliation가 저자와 저자가 몸담은 정원을 통해서 일어나길 소망한다. 


#선율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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