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자 저, '모순'을 읽고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삶
양귀자 저, '모순'을 읽고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이름은 안진진. ‘참 진’ 자가 두 번이나 연거푸 쓰였으나 성이 하필 ‘안’씨였던 사람. '진진'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사람도, '안'이라는 성을 물려준 사람도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딸에게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참한 성품은 물론이고 그 어떤 긍정적인 가치를 기대했다 하더라도 자신의 성 때문에 정반대의 의미를 가지게 되리라는 사실을 몰랐던 걸까. 아버지의 타고난 그 무엇이 딸에게 기대했던 그 어떤 것도 부정해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예견하지 못했던 걸까. 혹시 아무리 강한 삶에의 의지도 천성이나 운명을 이길 수 없다는 철학을 무의식 중에 전달했던 건 아닐까. 그것도 아니면, 그저 무책임했던 걸까.
안진진에 의해 묘사되는 아버지의 모습은 평범한 아버지 상을 거스른다. 그는 가정에서 폭력을 일삼았고 툭하면 집을 나갔으며 아내가 어렵게 벌어온 돈도 훔쳐갔다. 술주정쟁이에다가 돈도 벌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는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인가에 외로이 저항했던 걸까. 책을 다 읽고 보니, 아닌 것 같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의 무능력한 방탕함은 자신의 천성을 고스란히 따른 결과로 해석된다. 그의 마지막 가출은 5년 만에 끝이 났다. 다시 돌아온 그는 부랑자의 모습이었다. 중풍과 치매까지 업어왔다. 그 누구도 살리지 못했던 사람,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까지 짐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던 사람. 그가 바로 은연중 참하디참한 딸을 바랐으나 자신이 이미 갖고 있던 것으로 자신의 바람을 부정해 버린 안진진의 아버지다.
다행히 안진진은 아버지의 삶을 따르지 않은 듯하다. 아버지가 물려준 성이 아닌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 대로 살아가는 듯해 보인다. 그렇다면 안진진은 이름의 권세를 극복했던 걸까. 아버지의 부정적인 모습을 닮아 비뚤어지고 반항하는 삶을 살아가는 남동생도, 시장에서 팬티와 양말을 팔아 남은 돈으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해 나가며 가족을 살리는 어머니도, 그리고 어머니의 일란성쌍둥이 동생인 이모까지 이해하고 품는 그녀는 동시에 사귀고 있는 두 남자 중 하나를 덥석 선택하지 못할 정도로 합리적이고 객관적이며 솔직하다. 그리고 자신의 불우한 가정환경을 나름대로의 긍정적인 방법으로 극복해 나간다. 이십 대 중반까지 아버지가 자기 인생에 구멍 낸 곳을 메꾸느라 이룬 것 하나 없었지만 그녀는 큰 불평 없이 모순되고 이율배반적인 삶을 살아간다. 아마도 이 부분이 많은 독자들에게 암묵적인 위로와 공감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안진진의 이러한 씩씩한 삶은 책을 여는 첫 문장 [어느 날 아침 문득, 정말이지 맹세코 아무런 계시나 암시도 없었는데 불현듯,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나는 이렇게 부르짖었다. "그래, 이렇게 살아서는 안 돼! 내 인생에 나의 온 생애를 다 걸어야 해. 꼭 그래야만 해!"]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나 이 책은 운명을 극복해 낸 한 여성의 간증집이 아니다. 제목부터가 '모순' 아닌가. 책의 마지막 부분, 그녀가 김장우가 아닌 나영규와 결혼하기로 결정하는 장면에서 (그것도 스스로가 자신의 반응을 객관적으로 분석한 뒤 나영규가 아닌 김장우를 선택한 이후에, 또 그것도 온실 속, 아니 궁전 속 무료함 속에서 살아가던 이모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사건을 현장에서 목도한 이후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었다. 나영규는 안진진보다 자기 계획의 성취 여부를 더 사랑하는 남자였다. 안진진은 나영규의 인생계획을 완성시키는 중요한 조각일 뿐이었다. 한편 안진진은 김장우 앞에서와는 달리 나영규 앞에서 더 나은 사람으로 서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의 이끌림을 부정하고 끝내 그녀는 나영규를 선택했던 것이다. 놀랍게도 나영규와 헤어지기 위한 이유는 많았으나 그와 결혼하기로 한 이유는 많지 않았다.
이모가 자살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교과서 같은, 아니 어쩌면 기계 같은 이모부와 이모부 덕분에 굴러들어 온 지극한 안정감이었다. 그 지극한 안정감이 무덤이 되어 이모의 목을 졸라맸던 것이다. 나영규는 이런 면에서 이모부를 닮았다. 그리고 굳이 대비하자면 김장우는 아버지 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남자가 이모부 유형과 아버지 유형, 이렇게 이분법으로 구분할 수는 없겠지만, 안진진은 과연 안정감을 선택했던 것일까. 저자 양귀자는 이 부분에서 모순을 극대화하려고 의도했던 건 아니었을까.
자살로 남긴 이모의 가르침을 거부하며 나영규를 선택한 안진진은 그렇다면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이모처럼 '무덤 속 같은 평온'한 삶을 살게 될까, 아니면 남편이 나영규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처럼 지루할 새 없는 삶의 전사로 살아가게 될까.
안진진이 나영규를 선택한 이유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가지만, 왜 김장우를 선택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아마도 그 답은 모순이라는 단어 속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모순에서 엉뚱하게도 희망을 발견한다. 안진진에게 김장우는 아버지가 아니고, 나영규는 이모부가 아닐 수 있다는 것. 부모 세대에서 작동하던 이분법이 안진진 인생에서도 그대로 작동한다면 그건 결코 모순이라 할 수 없으므로. 그러므로 나는 안진진을 응원하기로 한다. 그녀가 나영규를 선택했기 때문도 아니고, 김장우를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도 아니다. '스스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바로 이 책 첫 문장에 쓰인 안진진의 외침을 실현한 것이라 믿게 된다. 모순된 인생을 정면돌파하는 방법은 모순될지라도 나중에 잘못된 선택이라고 평가받게 될지라도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결론을 조용히 내리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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