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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역설

내가 깊은 불안을 느낄 때

by 김영웅

내가 깊은 불안을 느낄 때


불안의 역설


어른이 되고 나서부터였을까, 현실이라는 시공간에 덩그러니 내던져진 나 자신을 발견하면서부터였을까. 새해가 되면 늘 내 마음엔 깊은 불안이 스며들곤 했다. 나는 자주 텅 빈 눈이 되어 허공을 응시하게 되었고, 초점을 잃은 채 창백한 기분이 되었으며, 실제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지만 마치 힘든 노동을 한 것처럼 피로에 지친 사람이 되었다. 누군가에게 쫓기듯 마음이 조급해지나 정작 아무도 나를 쫓지 않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허탈해했다. 마음에 두고 있던, 그래서 공기처럼 익숙해졌던 그 무엇이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무너져 버릴 것 같을 때 나는 더럭 불안을 느꼈던 것이다. 징후는 명징하나 원인은 언제나 불분명한 기분, 불안. 익숙하고 확신에 차 있을 정도로 자명한 모든 것들도 의심하게 만드는 강력한 힘, 불안. 새해가 될 때마다 이런 의식을 치렀던 건 아마도 내가 그동안 달려온 시간들이 틀릴지도 모른다는, 혹은 엉뚱한 걸 쫓아왔는지도 모른다는 불확실성을 직면해야 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중 하나는 이 불안이라는 녀석은 평상시에도 늘 나를 감싸고 있다는 것인데, 연말연시처럼 지나온 날들을 돌이켜보며 의미를 곱씹는 특별한 시간표가 아닐 때에는 좀처럼 인식하지도 못한다. 놀라우면서도 두렵기조차 한 이 사실은 일상이라는 긴 잠에서 문득 깨어날 때마다 가장 먼저 느끼게 되는 감정이 바로 불안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불안은 안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잠시 잊힐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상이 무탈하게 느껴지는 까닭도 신의 선물인 망각의 열매이리라.


마흔을 넘어설 무렵 그 어느 때보다도 불안을 두려워했다. 인생의 낮은 점을 지나며 가치관과 세계관의 변화를 겪던 시기였다. 가족을 데리고 무턱대고 아무 연고도 없는 미국으로 건너갔던 그때, 정작 뭐 하나 이루어 놓은 게 없다는 생각에 매일 숨이 차 올랐다. 평소에 물질적인 가치에 저항하며 살았다고 자부했건만, 그 시기의 나는 든든한 직장, 두둑한 통장이 가져다주는 부와 명예를 은밀하게 욕망했다. 나의 내면은 두 세계로 분열되었고, 그 괴리감에 매일 무너졌다. 내 인생은 외줄 타기인 것만 같았고, 내 손엔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자꾸만 작아져갔고 외톨이가 되었는데, 무엇보다 나로부터 그렇게 되었다는 점이 가슴 아팠다. 나는 자연스레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많은 시간이 지나고 지금은 그 시절에 나를 압도했던 외로움과 불안함에 감사하는 마음이 된다. 외롭지 않았다면, 불안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내가 존재할까. 과연 나는 읽고 쓰는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 더욱더 그런 마음이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 이것이 인생의 신비이리라 - 나를 읽고 쓰게 만들었던 건 다름 아닌 외로움과 불안이었다,라고 지금의 나는 고백하게 된다. 그것들이 나를 절박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힘겨웠던 그 시간들을 극복했기 때문에 읽고 쓰게 되었는지, 읽고 쓰게 되었기 때문에 그 시간들을 극복해 낼 수 있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둘 다라고 막연히 생각할 뿐이다. 아무래도 상관이 없지 않나 싶은 생각도 크다. 어쨌거나 그 시기를 지나오며 읽고 쓰는 일은 내 삶의 일부가 되었고, 나는 그것들로 말미암아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었으며, 여러 크고 작은 우물들을 벗어날 수 있었고, 이전보다 깊고 풍성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이젠 그렇게나 어색했던 작가라는 말도 감사하게 받아들인다. 나는 과학자이자 작가이다.


조용한 시간, 지금도 눈을 감으면 내 삶의 일부였던 그 시간들이 떠오른다. 외롭고 불안했던 그 시간들을 견뎌내며 내 안에 조금씩 자리 잡은 고요한 침묵의 순간들. 마음껏 읽고 쓸 수 있었던 그 시간들. 그 소중한 나날들. 아, 왜 아련한 기억들은 행복과 불안을 동시에 머금고 있는 걸까.


산에 굴곡이 있어야 햇빛이 비칠 때 음영이 생겨 입체적으로 아름답게 보이는 것처럼 오래 기억되는 과거의 아련함뿐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향유할 수 있는 현재라는 시공간도 불안을 머금고 있기에 행복의 입체감이 증폭되어 더욱 아름답지 않나 싶다. 어쩌면 불안은 행복을 파기하지 않고, 다만 입체감을 더할 뿐이지 않을까. 불안의 역설이다. 그리고 나는 제2의 외로움과 불안을 갈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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