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깊이 읽어야 하는 이유
기발하고 엽기적인 장치를 동원하여 독자의 이목을 사로잡아 자본을 겨냥하는 경박한 소설이 아니라면, 소설은 타자를 공감하고 타자의 입장이 되어 보는 훌륭한 도구가 된다. 나로 가득했던 내가 타자의 삶에 간접적이나마 깊숙이 개입해 본다는 건 매력적인 일이다.
공감은 두 가지로부터 이루어지는 것 같다. 하나는 머리, 다른 하나는 가슴이다. 머리로 공감한다는 것은 이성과 논리를 기반으로 한다. 이해라는 단어를 써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가슴으로 공감한다는 건 다른 얘기다. 당사자의 입장이 되어 그 상황에서의 복잡한 여러 감정의 실타래를 온몸으로 느껴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자기가 직접 경험한 과거의 기억에 의해 증폭된다. 그러므로 직접적인 경험의 부재는 가슴으로 공감하는 효과를 제대로 내지 못한다는 말도 틀리진 않을 것이다.
소설을 읽고 공감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작품 속에서 다뤄지는 이야기가 자신의 경험과 중첩될 때 그 소설은 더 이상 책이 아닌 삶이 된다. 허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살아있는 이야기가 되고, 타자의 인생이 아니라 내 인생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우리가 모든 소설을 이런 식으로 읽을 수는 없다. 우리가 모든 일을 경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소설의 아주 일부에 깊은 공감을 하게 되고, 나머지는 머리로 공감하는 차원에 머물게 된다.
소설을 처음 읽기 시작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과 중첩되어 가슴으로 공감되는 작품만을 좋은 소설이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가슴으로 공감되지 않으면 그 소설은 별로라거나 좋지 않다고 판단해 버린다. 그러나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나아가 소설을 제대로 읽어내기 위해서는 이 단계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머리로 공감하는 이야기 속에서도 충분히 소설의 진가를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관점이 필요하다. 질문이랄까, 철학 혹은 인문학적인 시선을 갖지 않고 단순히 스토리텔링에만 감동받길 원하는 독자에겐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이 부분은 ‘소설을 주로 읽는다’라는 말의 뉘앙스를 크게 둘로 나누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스토리텔링에만 초점을 맞춰 술술 읽히는 소설만을 쫓아다니는 ‘소설을 주로 읽는’ 독자는 단순히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일 뿐이다. 그러나 어떤 관점을 가지고, 어떤 질문을 가지고 ‘소설을 주로 읽는’ 독자는 단순한 이야기를 넘어 그 이면에 숨겨진 메시지를 찾아내고자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철학이나 인문학 서적을 읽는 것보다 훨씬 더 깊고 풍성한 유익을 얻어낼 수 있다. 나는 이왕 소설을 읽기로 했다면 모두 후자가 되기를 소망한다 (물론 후자가 되기 위해서는 소설만 읽어서는 안 된다. 철학 혹은 인문학 서적을 어렵더라도 읽어내야 하는 과정이 필수다. 평소에 질문하고 답을 찾는 삶을 살고 있다면 이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후자의 경우, 한 가지 놀라운 비밀을 알게 된다. 머리로 공감하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익이라는 점에서 각별하다. 타자의 생각과 마음, 삶 속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타자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결국 나 자신의 깊은 곳을 더 발견하게 되고 성찰하게 되며 인간이라는 종에 대한 통찰에도 이르게 된다는 점이다. 타자라는 문을 통해 다다르는 중간 장소가 나 자신이고,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이르게 되는 곳이 인간이라는 존재자라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소설을 읽는 최대의 유익이고, 소설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