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테 단편선

희미한 마음들

by 영엽




2024/7

한마디로 이때까지도 난 진정한 나는 그 자체로 인정받고 사랑받지 못할 사람이라 생각했다. 모순적이게도 특별한 대우가 받고 싶었다. 못난 부분은 감추고 연기해서 좋은 것만 보여주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던 거지. 어마어마하게 뒤틀린 신념이 무의식 속에 박혀있었다. 여전히 ‘인정 중독’ 상태에 빠져있다는 걸 알아차린 것. 나 스스로를 평가받는 대상으로써 도마 위에 올려두고 남이 하는 말과 스스로의 기준으로 보기 좋게 난도질하는 게 뼛속 깊이 습관화되어 있었다. 스스로의 가치를 남의 판단 없이는 알아낼 수 없을 정도로 자아가 형성되지 않았음을 느꼈다.





2024/11/5

오늘 감람석을 닮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광물 닮은 꼴’에 조심스럽게 이유를 물어보니 ‘연둣빛과 살아있는 느낌이 너와 닮았어.’라고 한다. 알쏭달쏭한 말들 사이에 나를 알아봐 주는 애정이 있어 너무 좋았다. 덤덤한 것처럼 보이는 친구였는데 세심하고도 다정하구나. 오늘은 그 친구가 무엇을 닮았는지 생각해 보련다.




2024/11/12

N은 고백이라는 말에 치를 떠는 나에게 ‘좋아하는 감정에 솔직한 게 뭐 어때?’라며 웃더랬다. 그러게, 나는 정작 중요한 것들에겐 다가가기도 솔직해지기도 어렵더라. 내가 겁이 좀 많다. 나에게 대화만으로 거대한 파도를 일으키는 사람이 혹시나 나를 밀어내고 상처 줄 것이 무엇보다 두렵다. 나는 안전한 울타리 속 관계들과만 지낸다. 그 밖의 것은 아무리 탐이 나도 그곳을 벗어나 손을 뻗을 용기가 도무지 나지 않더라는 것이다.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다. 영원히 울타리 속 관계에만 얽혀있을 수도, 그것에 만족할 수도 없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나갈 수 없는 이유를 아흔 개쯤 대고 있을 때에는 이미 그것들은 떠나고 없을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왜 좋아하는 만큼 약해지는 것일까.





2024/11/28

누구 이야기를 하든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똑똑히 인식하면서 말하기. 진심이 아닌데 과장되게 말하는 버릇 고치기. 어색하면 어색한 대로를 놔두는 연습. 특히 남의 외모, 행동, 습관, 성격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비난하거나 가볍게 여기어 놀리지 않으려 노력하자. 내뱉은 말에 내 이름 넣어서 생각해 봐.

남 기분 맞추어 준다고 남이랑 또 다른 남에 대해 험담하지 않기. 실속 없는 단어의 뭉터기임을 계속 인식시키기. 정신이 멍해질 때는 당장의 오늘에 집중. 해야 하는 일을 머리에 새기기.

그리고 위의 모든 것들이 지켜지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절대 미워하지 말 것. 나를 별과 같은 존재로 키워줄 것.





영과 영


오랜만에 영에 대한 생각을 한다. 평상시엔 남과 떠들거나 남 인생을 구경하거나 읽거나 들으며 보냈을 시간에 영과 마주 본다. 텅 빈 메모장과 커피와 크루아상만 두고서 마구 마주 본다. 바락바락 소리 질렀다가 낑낑 울었다가 하는 영을 난 어떻게 보아야 하지? 그 애를 남이라 여길 수 있다면 안쓰러운 눈빛과 위로 몇 마디면 충분할 텐데 말이야. 무엇보다 평상시의 나는 영에게 존나 못됐게 굴었어서 ‘누가 널 그렇게 힘들게 했어…’라는 가식은 못 부리겠고. 그래서 그냥 듣기만 했다. 뭐가 그렇게 괴로운지 어쩐지, 뭐 어떻게 해주면 좋을지, 그런 거. 열심히 듣기만 하다 나도 모르게 질문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그렇게 머쓱한-불완전한-온전한 영과의 대화를 마쳤다. 영은 종이로 만든 배를 타고 살아가는데-맨날 팔랑거리고, 엎어지고, 가라앉는다.- 그래도 자꾸 살아보겠단다. 근데 노가 없대. 바람 좀 꺼졌음 한대. ‘야 네가 탄 배가 종이밴데 바람을 타야지’하니까 자긴 바람 가는 곳에 가기 싫다고 자꾸만.







유릿돌 해변


캐나다엔 파도가 치는 호수가 있다.

거기서 우린 유릿돌을 필사적으로 찾았어.

(지금 생각해 보면 그곳은 쓰레기의 종점인 것 같아. 어딘가에서 깨져 더 나아갈 곳도 없이 파묻힌 쓰레기.) 따끔거리는 모래사장을 지나 호숫가에서 온 바닥을 헤집고 다녔지. 그러다 보면 모래를 한 움큼 쥔 내 손바닥에서 반짝이는 것들이 보여. 무척 예쁜 연둣빛이 기억나. 지금도 그 색깔이 눈에 선하다.

삼주 간 우리가 주운 그 유릿돌들은 생수병을 거쳐 내 작은 보석함 속으로 들어갔다. 굳어버린 물방울 같던 그 보석들. 이 기억을 오랫동안 잊고 있었어. 어떻게 잊었을까? 유릿돌은 전부 어디로 간 거야? 며칠 전 울음을 토해낼 때 이 기억들이 떠올랐다. 왜?